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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영광교회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용규목사, 2011-02-28 22: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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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예수님과 가치관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가요? 정말로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삶 속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목숨같이 지키려고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명예일까요? 권력일까요? 체면일까요? 학력일까요?...

1.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예수님께서 대답 잘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서 한 율법 전문가가 대표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도 결국, 이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사랑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믿음의 사람의 존재이유 그 자체입니다. 사랑이 빠진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듯이, 사랑이 빠진 크리스천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먼저 속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정신, 영혼)을 다하고 뜻(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속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예배 때에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1/10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9/10는 세상을 사랑하는 그런 모습도 아닙니다.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당신은 두 번째야. 내가 첫 번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고등학교 동기 00야. 당신도 이해하지?’어찌 이것이 참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 주고, 영혼을 다 주고, 생각을 다 주는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겉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을 다하여 라고 하지 않고,‘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속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람에 대한 것은 겉 사랑입니다. 실제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랑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두 번째 것도 첫 번째 것과 똑 같이 중요하다)’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한 몸에서 겉과 속을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인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인 것입니다. 이 두 사랑이 잘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에 그 사랑은 곧 건강한 사랑이요, 아름다운 사랑이요, 능력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둘 다 똑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되,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사랑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2. 지체의식과 형제의식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자신)같이 사랑하라’
왜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을까요? 세상 사랑의 대표가 형제 사랑이니까? 네 형제같이 사랑하라고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이 말씀의 실천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그래도 가능한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같은 형제끼리도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의 불행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성공이 나의 실패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웃음 소리가 나의 아픔을 더욱 쓰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이 고스란히 내 행복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기쁨이 그대로 내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몸이 되면 됩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한 몸 의식’, 지체의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형제의식’만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세요. 형제간에 시기, 질투, 경쟁의식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무엇입니까? 형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하여 죽인 사건이지 않습니까? 요셉이 누구 손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까? 형들 손에 의해서가 아닙니까? 야곱은 누구를 속였으며 누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형 에서였습니다. 라헬은 누구를 질투하여 자기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들여 보냅니까? 언니 레아가 아니었습니까? 라헬은 여종 빌하를 통해서 두 번째 아들을 얻게 되었을 때에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창30:8)라고까지 했습니다. 형제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무서운 경쟁의식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쟁의식은 자연히 시기, 질투, 미움의 부산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한몸 의식’, 지체의식’은 다릅니다. 그 사람을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경쟁의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흔히 부부를 한 배를 탔다고 말합니다. ‘한 배 의식’입니다. 같은 배를 탔으니 운명을 같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평과 원망, 미움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맞지 않으면 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자식의 줄에 얽매여 중간에 내리지도 못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부부가 한 배가 된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부부에게는 한몸 의식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부부는 두 몸이 아니라 ‘두 지체 한 몸’입니다. 그럴 때에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같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게 되는 것입니다.
지체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아픔도 기쁨도 다 공유합니다. 지난 주는 몸살 감기로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새벽기도회 때에 설교를 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밤새도록 기침이 멈추지 않아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앉아서 밤을 새웠습니다. 물론 계속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물을 마시면 좀 나을까 하여 물도 마시기도 하고, 목에 소금을 바르기도 하고, 약을 먹어 보기도 하고… 그래도 기침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옆에서 그렇게 기침을 했는데도 제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잤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한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다른 곳은 아프지 않았습니다. 목만 기침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손이나 발은 편안하게 쉬어야 하는데 전혀 쉬지 못하고 똑같이 밤새도록 고생했습니다. 왜 일까요? 같은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지체는 자연히 몸의 아픔을 함께 나눕니다. 한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유명한 축구 선수가 월드컵에서 7골을 넣어서 MVP로 선정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시합 중에 손이 실수하여 페널티킥을 허용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시상식에서 발만 좋아할까요? 손은 기가 푹 죽어 있어야 할까요? 자기 같은 것은 없는 게 낫다고 해야 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상 받을 때에 누가 받습니까? 발이 받습니까? 아닙니다. 당연히 손이 받습니다. 악수는 누가 합니까? 손이 합니다. 손은 누가 흔듭니까? 손이 합니다. 손이 제일 설치고 다닙니다. 왜요? 한 몸이니까요. 발이 잘한 것은 곧 손이 잘 한 것입니다. 똑 같이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몸이니까요. 기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지체의식’ ‘한몸의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의 일부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온전한 사랑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어머니의 사랑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느 사모님(유정옥)의 이야기입니다. 첫 면회를 갔는데, 사랑하는 아들이 고참병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참병이, 매일 아침 연병장을 뛰고 자기에게 보고한 뒤에 아침을 먹게 했습니다. 이 아들은 천식으로 특히 아침에 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머니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아픔을 억제하면서 아들에게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자고 위로해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매일 아침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들이 뛰는 시간에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었습니다. 이것이 자식과 함께 아파하는 어머니의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한 달 뒤에 아들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 저는 오늘에서야 하나님의 축복이 시련이라는 가면을 쓰고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동안 연병장을 뛰면서 때로는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 날로 단번에 끝장을 낼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완전군장을 하고 구보를 하면서 저는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지난번 구보 때까지는 천식으로 숨이 막혀 뛰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뜬히 다 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상관을 통하여 저의 지병인 천식을 다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 상관이 너무 고마워서 고맙다고 경례를 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일부터는 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내일부터는 제 스스로 뛰겠습니다. 어머니께 이 기쁨을 할렐루야!’
사랑의 열매는 인내를 통해서 맺어집니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모두 인내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완전군장으로, 천식의 몸을 이끌고 아무 이유 없이 뛰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꼭 선한 열매를 맺어다 줍니다.
자식과 함께 아파하는 어머니의 그 사랑을 하나님은 모른다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그 아픔의 기간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의 눈물, 사랑의 기도, 사랑의 구보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아들에게 천식치유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14 コメント

김은혜

2011-03-01 20:56:57

우리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둘 다 똑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되,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사랑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하나님을 사모한다 말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잊고 지낸 건 아닌지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주위에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따라 좋을 때도 미울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다 좋은데 한가지 나쁜 버릇 때문에 그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고. 어떤 사람은 또 생각하는것이 나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저 사람을 왜 저럴까..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라며 그냥 단념했던 적도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면 전 늘 역시 나에게는 주님뿐이야라며 주님만을 사모해야지 했던 저에 작은 마음을 반성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자신)같이 사랑하라’

그런 내 주윗 사람들을 내 지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이해 할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들이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을때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서로 서로 자기 몸과 같이 남을 생각하며 사랑하고 배려하고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다른 사람의 좋아할 수 없는 부분 조차도 내 몸에 한 부분이라 생각하며 그 사람을 미워하기 보다는 기도로써 또 도움을 줌으로써 예수님과 같이 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김복남

2011-03-01 21:23:54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남편이 곧, 내 몸이요. 부모가 곧 내 몸이요. 자식이 곧 내몸이요. 친구는 물론 일가친척도 물론이며 관계가 다르고 성씨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이웃들 모두가 바로 곧 내 몸임을 깨닫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시면서 목숨을 바치면서 우리들을 똑같이 사랑하여주셨습니다. 누구는 더 사랑하시며 누구는 덜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역시 조건부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온전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어야 겠습니다.

박유진

2011-03-01 22:10:01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이 고스란히 내 행복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기쁨이 그대로 내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몸이 되면 됩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한 몸 의식’, 지체의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는 인내를 통해서 맺어집니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모두 인내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완전군장으로, 천식의 몸을 이끌고 아무 이유 없이 뛰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꼭 선한 열매를 맺어다 줍니다."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먼저, 전 제 가족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요즘 아침마다 아이들과 전쟁(?)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육원 가기까지의 시간동안 매일같이
아이들은 울고, 저는 소리지르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빨닦기 싫어, 옷입기 싫어, 양말 신기 싫어...싫다는 아이를 붙잡고 시간에 쫓겨서 억지로 힘으로
아이에게 해버리면, 아이는 더욱 소리를 지르며 울게 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아이에게 강제로 옷을 입히고 이를 닦입니다.
만약 아이를 내 몸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내 몸에 억지로 싫어하는 걸 시키지는 않으니까요.
아이들의 감정을 내 감정으로 빋아드리는 '한몸의식'을 가지고, 아이를 대하기를 이번주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변의 친구들과 이웃들을 대할 때에도, 한몸의식을 생각하며 이번주 말씀을 적용하겠습니다.

강현수 집사

2011-03-01 23:24:25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도 결국, 이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사랑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믿음의 사람의 존재이유 그 자체입니다. 사랑이 빠진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듯이, 사랑이 빠진 크리스천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중에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예전에 도덕적, 윤리적 가치의 사랑과 봉사만을 알았고 실천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님과 십자가가 없는 사랑은 잘 못된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상민

2011-03-02 06:58:21

두 번째 사랑은 겉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을 다하여 라고 하지 않고,‘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속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람에 대한 것은 겉 사랑입니다. 실제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랑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두 번째 것도 첫 번째 것과 똑 같이 중요하다)’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한 몸에서 겉과 속을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인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랑을 실천하기란 정말 힘듦니다. 하지만 주님의 모습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이웃을 하나님과 같이 사라한다는 것임을 알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겠습니다. 지체의식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길이기에 남이 아닌 나의 몸의 지체임을 항상 깨닫고 맘으로 몸으로 실천해가는 제 자신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이란 것이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항상 내 맘속에 주인으로 계신 주님을 따라 내맘과 몸을 다해 주님의 종된자로서 살아갈때 사랑이 저절로 묻어나오리라 믿습니다. 나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의지를 따라 행하는 삶이 곧 사랑의 삶임를 말입니다. 주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이 24시간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한은정

2011-03-02 07:56:08

사랑의 열매는 인내를 통해서 맺어집니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모두 인내입니다.
자식과 함께 아파하는 어머니의 그 사랑을 하나님은 모른다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그 아픔의 기간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의 눈물, 사랑의 기도, 사랑의 구보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아들에게 천식치유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없이 고난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시간을 잘 이겨낸 사람은 큰 은혜를 받을것입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을때 바로 해결해주려는것보다
그 문제를 놓고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이 스스로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것도 좋은 방법인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랑의 인내를 하며 제가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힘쓰겠습니다.





이 은미

2011-03-02 08:02:43

지체의식’ ‘한몸의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의 일부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온전한 사랑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설교 말씀을 들으며 나는 이웃이나 남편을 별로 내 몸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웃을 대할 때 지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형제나 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몸처럼 온전한 사랑을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웃에게 아프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울고 아파하는 일은 쉬운데 이웃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축하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100% 함께 웃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또한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남편이 말을 걸어오면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말이 길어지겠다 싶으면 대충대충 말을 끊기도 합니다. 사역 훈련 시간에 인생의 우선 순위는 첫번째가 하나님과의 교제고 두번째가 가족이고 그 다음이 세상 일이라는 말을 들으며 참 많이 회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이웃이나 가족을 대할 때 형제 의식이 아닌 지체 의식을 가지고 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께서 내 잘 못된 생각을 바꿔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예수님과 가치관이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기란 참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내 상황에 따라 가치를 판단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숨쉬는 매순간 순간마다 예수님을 의식하며 예수님을 쏙 빼닮은 자가 되어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강현수 권사

2011-03-02 08:13:37

그러나 ‘한몸 의식’, 지체의식’은 다릅니다. 그 사람을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경쟁의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흔히 부부를 한 배를 탔다고 말합니다. ‘한 배 의식’입니다. 같은 배를 탔으니 운명을 같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평과 원망, 미움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맞지 않으면 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자식의 줄에 얽매여 중간에 내리지도 못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부부가 한 배가 된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부부에게는 한몸 의식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부부는 두 몸이 아니라 ‘두 지체 한 몸’입니다. 그럴 때에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같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한몸으로 생각하다가도 내몸에붙어있는 나의 지체를 내가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나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주님말씀 묵상하며 내몸인 남편의 의사를 존중해줘야 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하며 남편의 의견을 수용하려고 노력해보니 특별히 감정상할일이 아니라는것이였습니다. 의지적으로 주님 의식하며 사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새로온 직원들에게도 일을 가르치는 과정이라든지 조금이라도 엄마의 마음으로 대하다보니 직원들이 힘은들고 피곤하여도 열심히 배우고 싶고 재미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문미경

2011-03-02 10:11:17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그래도 가능한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같은 형제끼리도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의 불행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성공이 나의 실패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웃음 소리가 나의 아픔을 더욱 쓰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이 고스란히 내 행복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기쁨이 그대로 내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몸이 되면 됩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한 몸 의식’, 지체의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형제의식만으로도 정말로 충분하다고만 생각해 왔었던 것같습니다. 그이상으로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정말 마음으로써 기쁘게 여긴다는것은 정말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말씀그대로 다른사람의 슬픔, 어려움속에서 나도 함께 슬퍼하며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경우는 많고 더 행하기 쉽다는 것을 다시한번 꺠달았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잘되었을때 그것을 마음으로써 기뻐해준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건지.. 저도 언니들이 잘되었을때 정말로 기쁘고 좋기도했지만 제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너무 못나보였던것도 사실이였습니다.
정말로 같은 가족, 형제인데도 잘되었을때 마냥 축하해주기만은 정말 어려운것같습니다.
하지만 나의 지체라면, 다르겠지요

슬픈땐 함께 슬프고 , 그리고 기쁠때 함께기쁘고

그사람을 의식할필요도 없을테니까 말입니다. 함께하는 지체의식이 있다면 다른사람의 시선을 의식할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자신의 문제 인것입니다. 나자신이 나와함께해야하는 사람들을 정말로 나의 지체로 생각한다면 저의 지금은 고민은 마음은 다 변할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현정

2011-03-02 20:03:59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지체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아픔도 기쁨도 다 공유합니다.]

저는 '지체'라는 말을 교회에 다니는 성도지만 나랑은 좀 거리가 먼 사람을 일컬을 때, "우리 교회 지체인데..."라고 호칭으로만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다 사역훈련 시간에 지체의식에 대해 배우고는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 쉽게 지체의식이라는 단어만 제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주 설교시간에 다시한번 지체는 한 몸임을 깨우치고, 지금 설교말씀을 정독하면서 '지체'에 대한 사랑을 묵상합니다. 눈으로 읽지만 말고, 생각만 하지말고,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저는 제 자신이 얼마나 육신을 아끼는 사람인지를 잘 압니다. 제 몸이 조금만 피곤하면 어떡해서든 빨리 쉬워주려고 바둥거립니다. 무서운 놀이기구도 제 몸이 어떻게 될까봐 목이 터져라 악을 씁니다(그럴거면 타질 말지!).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조금만 위험한 순간이 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잡이를 잡는 바람에 운전하는 사람마저 긴장하게 만듭니다. 아프리카 출장길에선 위험천만해 보이는 경비행기로 이동할 때 얼마나 속으로 떨었는지 모릅니다. 제 몸이 아프면 온 신경을 써서 약을 먹고, 평소 안 먹던 과일까지 챙겨먹는 등 수선을 떱니다. 내가 내 육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게 아닐 수 있습니다. 제가 제 몸을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니까요. 이웃을 사랑할 때도 한몸이기에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생각하며 재지 않고, 한아름 더 둥글게 끌어안아 사랑하고 싶습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자가 되어가겠습니다.

조태호

2011-03-03 07:33:18

[형제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무서운 경쟁의식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쟁의식은 자연히 시기, 질투, 미움의 부산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한몸 의식’, 지체의식’은 다릅니다. 그 사람을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경쟁의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

저는 형제라는 칭호가 주는 느낌이 그저 가족같고 친근하다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형제의식과 지체의식을 비교해 보거나 깊이 생각치 못하고 그저 형제든 지체든 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칭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형제의식과 지체의식을 확실히 구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 말씀을 다시 읽으며, 지난달 쯤 아르바이트중에 보았던 글이 떠올랐습니다. 어미새가 새끼새들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과정에도 새끼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존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미새가 먹이를 주기 직전 새끼들은 저마다 목청을 돋구어 큰소리를 먹이를 달라고 부르짖는데, 어미새는 생존 가능성이 큰 새끼를 살리려는 본능으로 인해 목소리가 큰 새끼에게만 먹이를 주며, 이렇게 해서 먹이를 먹은 새끼는 배가 불러져도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더욱 힘을 내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계속해서 먹이를 독차지 하다가 결국 나머지 형제들을 도태 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새를 비교하는 것은 물론 말도 안되겠지만, 저로 하여금 형제란 서로를 위해 주거나 돌보아 주려고 태어나는게 아니라 날 때 부터 한 부모를 놓고 경쟁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형제 의식에 빠진 사람은 늘 경쟁하게 되고 상대가 잘되는 것을 볼때마다 아픔을 겪어야 존재이므로, 삶이 늘 초조하고 불안하며 기쁨이 없는 모습이 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축구선수가 발로 공을 넣어도 손이 기뻐하고 손이 우승 트로피를 건네 받듯, 한 몸, 한 지체라면 남의 잘됨이 곧 나의 잘 됨이며, 나의 기쁨이 남의 기쁨이 되므로, 아무것도 염려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통해, 형제의식이 아니라 지체의식을 확실히 마음 깊이 심어, 내 주변의 지체들을 넓혀 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인 분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용관

2011-03-05 19:13:00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자신)같이 사랑하라’

진정 이웃을 자기 몸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웬지 보기만 해도 밉고 상대를 하기를 싫고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자기 안에 존재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잊어버리는 정도가 아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이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함으로 불가능 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화가나고 성령의 존재는 어느덧 없어지기 때문에 많이 힘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시고 누명을 쓰고 돌아 가셨습니다. 그것도 자기를 죽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랑의 극한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용서 할 수 없는 억울함이 예수님이 당한 이 정도일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보면서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못하지만 예수님이 주신 성령이라는 분으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자 훈련 받기 전까지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그 사람에게 당했다는 생각과 어울함 분함 미워함이 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훈련을 받고 나서 점점 기억속에서 잊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사랑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이젠 생각해도 그리 화가 나지 않을 정도까지 하나님 은혜로 많이 나아졌습니다. 교회의 성도들과의 관계도 한 지체인 것처럼 사랑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특히 제자 훈련 생들을 한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혜진

2011-03-06 08:39:24

사랑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 주고, 영혼을 다 주고, 생각을 다 주는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겉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을 다하여 라고 하지 않고,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속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람에 대한 것은 겉 사랑입니다. 실제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랑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두 번째 것도 첫 번째 것과 똑 같이 중요하다)’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한 몸에서 겉과 속을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인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인 것입니다. 이 두 사랑이 잘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에 그 사랑은 곧 건강한 사랑이요, 아름다운 사랑이요, 능력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둘 다 똑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되,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사랑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고 사랑을 할 줄 안다고 착각 하며 살아왔던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정말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랑이 많은 사람인가? 라며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처럼 사랑을 하느냐 안하느냐 말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것,,,어떻게 사랑을 하고 있는것인가 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알았습니다.
누군가가 사랑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함으로 인해 사랑을 표현한다는것이였습니다. 상대가 힘들지 않게 도와주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것이 사랑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말로만 사랑을 표현했던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사람에 대한 사랑도 ....
말뿐인 사랑이 아닌 진정한 맘속에서부터 나타나는 표현과 행함이 있는 균형을 잘 이룬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손주희

2011-03-06 08:51:46

주님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이 말씀의 실천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그래도 가능한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같은 형제끼리도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의 불행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성공이 나의 실패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웃음 소리가 나의 아픔을 더욱 쓰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설교 말씀을 들으며 예전에 동생과 저의 상황을 비교해가며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느끼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면서도 항상 붙어다니던 친구가 좋은 작품으로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면 입으로는 축하해주었지만 맘으로는 그만큼 축하해주지 못했었던때가 떠올랐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 속이 좁아서 누군가를 내 지체로 받아들일 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신데, 주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작아질뿐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에게 사랑으로써 친절하게 대할 수 있도록, 거짓없이 진심을 담아서 즐거운 일에는 같이 즐거워하고,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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