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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영광교회

언약궤와 암소

이용규목사, 2009-06-29 16: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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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주고, 가르쳐 주고, 인도하기 위해서 왔다. 다시 말해서 인생길은 천국을 향해서 걸어가는 길인데, 바로 그 길을 알려 주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그 길을 똑바로, 끝까지 잘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된 인생길이다.

1.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 자신이 있는가?
인생길의 종착역에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후회 없는, 자랑스런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수시로 거시안적 안목에서 자신의 인생길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서울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막상 내려 보니 뉴욕이었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지난 주에 요코하마에서 동경에 오려고 전철을 탔는데, 그 전철이 하치오지로 가는 것인 줄을 나중에야 알고는 얼마나 허탈하고 짜증이 나던지 몰랐다. 전철이나 비행기는 다시 돌아오면 된다.
그러나 천국 길은 다르다. 자신은 이 길이 바른 길, 복된 길인 줄 믿고 열심히 달려 갔는데, 목적지에 도달해 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길이 전혀 아니었다면, 얼마나 후회가 될까?
여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을 길이 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말씀의 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람의 판단은 어리석음 그 자체이다. 자신의 지식, 경험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범위 안에서 옳다고 판단한 것이 자신의 정답이다. 그래서 그는 결코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집까지 부려가면서 그 길을 고수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결말은 반드시 후회가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어리석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남의 유혹보다 특히 자신의 고집의 유혹을 이기고 말씀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런 인생은 당장은 약간의 혼돈이 올 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후회 대신에 환한 미소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자신의 인생 길을 매주 점검해 볼 수 있는 축복된 기회이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하게 되면, 인생이 성수되게 되는 것이다.    

2.        언약궤와 인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중요하게 여기게 했다.
광야 생활에서도 항상 언약궤 중심의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들이 어느 곳에 머물 때에는 먼저 중심에 언약궤를 두고, 동서남북으로 각 지파들이 진을 치도록 했고, 행군을 할 때에는 앞뒤에 지파들의 반을 두고, 언약궤는 항상 중앙에 있도록 했다.
언약궤는 법궤, 증거궤, 하나님의 궤로도 불린다. 간단히 말해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놓은 궤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믿음의 사람의 인생은 언약궤와 직결된다.
언약궤를 귀하게 여겼던 사람은 귀하게 되었고, 언약궤를 천하게 여겼던 사람은 천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무엘과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다.
하나님은 엘리의 두 아들들은 전쟁터에서 죽게 하고, 대신에 사무엘을 엘리의 후계자로 세우셨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실 때에 그 사람의 가문이나 실력을 보지 않으신다. 오직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중심이 바른 사람을 쓰신다.
중심이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인 사람을 크게 쓰신다.
엘리의 두 아들은, 비록 제사장의 아들이라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무시하며,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다.(삼상2:12,13)
그런데 사무엘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있었지만, 잠을 잘 때에도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 있었다고 했다.(삼상3:3) 언약궤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사무엘의 언약궤는 오늘날, 말씀과 교회이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하는 성도는 사무엘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진정한 사무엘’을 꿈꾸어 보자.
언약궤 중심의 삶을 살 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지만, 대패했다. 언약궤와 함께 하기 전보다 약 10배나 되는 희생자를 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의 말씀이 있는데 왜 그랬을까? 말씀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그들은 단지 말씀을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의 대상이다. 말씀의 종이 되어야지 말씀을 종으로 부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터에서 언약궤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늘 중심을 보신다.  
전쟁에서 언약궤가 불레셋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러면 블레셋에서의 언약궤는 어떤 역사를 일으켰을까?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은 착각을 하곤 한다. 언약궤만 있으면 안심이다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모두 증명하지 않았는가?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자세이다.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언약궤를 받아야 한다. 말씀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믿음과 순종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말씀의 능력이 살아난다.

3.        언약궤와 암소
블레셋에서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에 두 마리의 암소가 등장한다.
이 두 마리의 암소는 ‘말씀 회복 길’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도전을 주고 있다. 발람이 나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듯이, 소들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자.
1) 불순종의 핑계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어미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그 수레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서 집으로 돌려 보내라’’(삼상6:7)라고 했다.
먼저 불순종의 핑계를 이겨야만 말씀 순종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불순종의 첫 번째 핑계는 ‘아직 멍에를 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나는 해 본 적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해 본 적이 없다. 말씀에 순종하려면 이 핑계를 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는 ‘어미 소’이다. 오늘날도 이것이 큰 문제이다. 새끼가 엄마 찾아서 ‘음메-‘하면 어미 소의 마음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이 과정을 통과해야 순종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자식 문제가 심각하다. 자식 때문에 주님의 일을 못하는 경우가 참 많다. 하나님이 자식을 최고의 선물로 주셨는데, 도리어 그 자식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길이 진정 축복된 길인지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할 것이다. 자녀, 가족이 주님의 일에, 순종에 걸림돌이 되는 어리석음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셋째는 ‘두 마리’이다.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순종이 어렵다. ‘저 사람하고는 일 같이 못해요.’ ‘저 사람 때문에 교회 나오기 싫어요’ 사람의 핑계가 생각보다 많다. 서로 맞기 때문이 아니라, 맞춰 가면서 일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이다.
경험 핑계, 가족 핑계, 사람 핑계, 이 세가지 핑계의 사자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소처럼 말씀을 끝까지 끌고 갈 수가 있다.    
2) 자발적 순종
‘그 소 두 마리가 가고 싶은 대로 수레를 끌고 가도록 하라’(삼상6:8)
누가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서 채찍으로 때려 주면 순종의 길을 잘 갈 것인데…
그러나 소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순종의 길을 걸었다. 이 길처럼 아름답고 축복된 길은 없다. 말씀 길은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다. 암소 두 마리는 자발적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바로 끝까지 언약궤를 끌고 이스라엘로 들어갔다.    
3) 온전한 헌신의 순종
목적지에 도착한 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레는 장작이 되고, 자신들은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물이 되었다.(삼상6:14) 소들은 언약궤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헌신되었다. 언약궤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 번제로 주님께 바쳐졌다. 그래서 그 소들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었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지혜의 소가 되었다.
벳세메스의 두 암소는 누구의 모습을 가장 닮았을까?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말씀을 주러 오셨다. 성육신의 모습으로, 즉 자신의 몸에 말씀을 담아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자신이 언약궤가 되어 천국에서 구원의 말씀을 이 땅에 배달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언약궤를 열어 생명의 말씀, 구원의 보혈을 부어 주시고,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다.
두 암소가 걸어갔던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어갔던 길이요,
오늘날은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 말씀 순종의 대로가,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도 뚫리기를 축복한다.  

12 コメント

조상만

2009-06-30 06:43:07

솔직히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길에 대해 100% 완벽하게 제대로 된 길을 걸어 왔다고 할 수 는 없군요. 일단 한때 퇴폐적인 길로 살짝 빠진 적도 있었고, 하나님의 길이 아닌 "나" 자신만의 길이 진리 인양 믿고서 주욱 걷기도 하고 넘어져 기어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혹해서 죄의 길로 들기도 했었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고 참 험난하게도 걸어온 길입니다. 하나님의 길로 Straight 하게 걸으면 될 것을 왜 여기 저기 꼬였다가 지그재그로도 갔다가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가 했던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심지어 기어서도 온 저의 길은 참 순탄치 만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를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이 저를 거둬 주셨는데 또 샛길이 가끔 아니 자주 눈에 들어 옵니다.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필히 아실테죠. 얼마나 또 한심해 하실까요. 우리는 왜 샛길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경험까지 하고도 왜 그 길을 들여다 보는 것일까요? 그저 하나의 길만을 좇아 가면 될것을 ... 오늘도 저는 하마터면 살짝 샛길로 빠졌다가 돌아 나올뻔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돌아온것이죠. 이제는 다른 길은 보지 않겠노라고 다짐 하면 사탄이 살짝 속삭입니다. 그러면 눈 한번 가지요. 왜이리 순종은 힘든지...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 봅니다. 순종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이 포지션을 유지 하기 위해서 !! 그리고 그 방법을 더잘 숙달 시키기 위해 저는 제자 훈련을 받았으며 이제 사역훈련에 대한 꿈을 지니고 걷고 있습니다. 많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저와 같이 걷기를 희망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믿고 소처럼 힘차게 한 발 한 발 뻗어 가겠습니다.

박빛나

2009-06-30 09:20:21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자세이다.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언약궤를 받아야 한다. 말씀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믿음과 순종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말씀의 능력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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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로 믿음과 순종이 들어가면 능력이 나타난다.
오늘! 월요일 부터 뭔가 꼬이는 것 같았다. 아침에 지진으로 깨워주시기까지 했는데, 또 잠들었다가 전화 소리에 깨어 헐레벌떡 회사로 달려갔다. 실은 아침 일찍 깨어 새벽을 깨우려고 했는데 말이다.
괜히 이런저런 일에 심술도 부리고 말았다. 일하는 시간에 딴짓도 하고 말이다.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하자고 해놓고선... 정말 반성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미뤄버린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한 가장 따뜻한 말들을 해줬다. (갑자기 '서쪽의 마녀가 죽다'라는 영화의 정말 자상했던 할머니 말투가 생각나지 뭔가!! 하나님은 보여주신 것들을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이럴때도 사용하셨다.^^;; )
하루 종일 꿍해있던 마음이 풀어짐은 물론이고, 반가운 전화도 오고... 자기 전에 말씀을 받으러와서 또
새힘을 얻게 되었다. 말씀 순종만하면, 나도 모르는 평안이 찾아온다는 걸 주님이 알려주셨다.

지난 말씀에도 많이 반성했음에도 입을 지키는 일이 참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언약맺은 내가 입 하나도 지키지 못해서 어찌한단 말인가!!
성령님의 도움을 구했으니, 또 승리한 한주간으로 지나갈 줄 믿습니다!!

최현숙

2009-06-30 20:16:48

요즘들어 부쩍 나는 창조주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 나를 인정하기 위해선 나를 만드신 분을 인정함이 옳기 때문이다.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로썬 인정을 잘 하지만, 내 삶은 그렇게 인정하면서 지내고 있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다.
내 고집과 내 의지가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암소만큼도 못한 내 모습을 봤다.
젖을 물린 암소가 새끼를 두고, 언약궤를 메고 이스라엘 진영쪽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갈 수 있을까? 통상적인 내 관념은 그것을 부인한다. 어릴적 내 경험은 소에 멍에를 메고 밭을 갈 때만 해도 아버지가 쉴세 없이 채찍을 휘둘리면서 워~워~ 소리를 연발하면서 소를 다루지 않았는가...혹 풀을 띁어 먹을까봐 소의 입에 망을 씌우기도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보편적인 소의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소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소를 움직이신다면 못 할 것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하나님이 소처럼 나를 움직이면 못 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소처럼 사용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길을 만들어 두시고 그 길을 가는 것은 내 의지에 맡기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길은 피조물인 내 생각으론 참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생각이 들 때가 있다.길을건널 때 바쁜길을 막는 신호등이 있을 때 그것이 거추장 스럽게 느껴지는 것처럼....그래서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널 때가 참 많다. 그리곤 신호등의 거추장 스럼에 짜쯩을 내기도 한다. 모든 것은 나름 유도리를 가지고 살면 되는 거야...이런 위로를 자신에게 한다. 사고나, 벌금을 물게되면 자신에게 손해가 온 줄도 모르구선.. (어리석은 모습)
그러나, 주님의 길은 주님을 묵상하면 할수록 주님과 교제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이란 사실을 더욱 깨달게 된다. 주님이 만들어 두신 길 (암소가 걸어간 길, 언약궤 중심으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길, )은 크고 대단한, 그리고 내가 애써서 알려고 노력하는 길이 아닌 주님과 교제하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하면서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왜 이길이 이렇게 어려워 보일까? 그것은 내 속에 타락한 죄성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유혹이 말씀길보다 더 달콤하기 때문이다. 환경에서 오는 핑계 때문에, 사람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나는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암소만큼도 못한 인생을 살지 말자.!!
나는 암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박정선

2009-07-01 09:08:37

'정선이가 예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그 길을 똑바로, 끝까지 잘 걸어가는 것이다.'
'정선이의 판단은 어리석음 그 자체이다. 정선이의 지식, 경험을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정선이가 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목사님이 하신 말씀에 내 이름을 집어 넣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순간, 말씀을 생각하지 않은 순간에는 기필코 쓸데없는 생각과 어리석은 판단이 내 생각을 차지해 버립니다. 그럼 그것들은 마음으로 내려가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고, 입으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내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길 원하시는데 내 의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나아가지 못하고 여지껏 살아온 습관대로 나아갈려 합니다.
벧세메스 두 암소는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말씀이 마음이 찡했습니다.
정신차리고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도록 박정선 화이팅!!

이정미

2009-07-01 16:44:04

주일설교 말씀에 은혜를 받았 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데... 도리어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지않고 이용하려 하였기에
축복을 저주로 바꿔버린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많은 메세지를 주는 말씀이다. 사실 요즘 나의 삶 자체가 그런것이 아닌가 싶어 오늘 아침에
새벽 기도를 하면서도 사실 마음이 아팠다.
기도를 하고 있으면서도 늘 의심을 하고, 말씀을 읽으면서도 형식적인 태도로, 삶속에 예배가 되지않고
분명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기도하고 충만하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그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여전히 세상의 방법으로 타협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고 속상하고
내가 너무 싫어진다. 사탄은 내가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가까히 가면 갈수록 나를 시험하고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들이고 나를 시험한다. 말씀을 가지고 있는것 보다 마음의 자세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의
언약궤로 단단히 고정시켜 나를 단련하고 나는 할수 없지만 내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늘 깨어있어 사탄의 밥이 되지 않도록 순간 순간 모든 삶이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함을 느낌니다. 어려울때, 힘들때 , 감당하지 못할때 ,참을수 없을때 그때가 기회임을 명심하자
아~ 하나님 또나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려고 하면서 기도 하면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김명화

2009-07-02 05: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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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하고는 일 같이 못해요.’ ‘저 사람 때문에 교회 나오기 싫어요’ 사람의 핑계가 생각보다 많다.
서로 맞기 때문이 아니라, 맞춰 가면서 일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이다.
말씀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믿음과 순종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말씀의 능력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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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설교 말씀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가 어떻게서 나는 이렇게 짜증을 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교만에서 왔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나의 이 교만을 깨닫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언제나 나에게 필요하신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의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맞춰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내입술이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내 마음이 주님께 하듯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회개하고 반성하며 …

최민정

2009-07-02 10:12:31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실 때에 그 사람의 가문이나 실력을 보지 않으신다. 오직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중심이 바른 사람을 쓰신다.
중심이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인 사람을 크게 쓰신다.

이번주 설교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길 원하신다는 말씀이 나에게
유독 와 닿았다.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다는것을 늘 느끼며 살아간다는것이
얼마나 복되고 기쁜일일지 ...그렇게 살아가기위해 소망하고 늘 깨어 있어야 겠다고
다짐해본다. 요즘 들어 육신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새벽기도도 잘 못나가고 점점
마음도 몸도 게을러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핑계는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나고 더이상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않는 자발적인 순종이 필요할때임을 느꼈다.
언약궤를 끝까지 지키며 자신의 몸까지 온전히 희생한 두 마리의 암소처럼 나도 온전한
헌신으로 내 믿음을 방해하는 긴급한 일들에 시험들지않도록 해야겠다.
더 큰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을 부어주실것을 기대하며...

홍은미

2009-07-02 18:28:59

자신의 어리석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남의 유혹보다 특히 자신의 고집의 유혹을 이기고 말씀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런 인생은 당장은 약간의 혼돈이 올 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후회 대신에 환한 미소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말씀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 이젠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 늘 마땅히 해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늘 내게 주어진 환경과 타협하고 있음이 부끄럽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것이 왜 그리 어렵게 느껴지는지... 늘 자기전 하루를 돌이켜보면 하나님께 핑계대기에만 바쁜 나날이다. 정말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었다면 나는 구약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불순종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잘 나지도 않고, 내세울만한 것이라곤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뿐인데도 나 자신을, 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 눈치 보면서 내 맘대로 생활하는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진다. 이제부터라도 핑계는 줄이고 자발적인 순종, 온전한 헌신의 순종을 하신 예수님의 뒤를 다시 따르도록 해야겠다.

문인우

2009-07-02 21:27:26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자세이다.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언약궤를 받아야 한다.
말씀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믿음과 순종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말씀의 능력이 살아난다.

제자 훈련을 시작하면서부터 언니와 함께 기도했던 언니의 장학금이 드디어 확정되었다.
나는 기도하면서 받았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언니는 장학금이 확실하게 발표나지 않았을 때에도 이미 받았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그때마다 저러다 못받으면 어쩔려고 저러나
나중에 실망이 클텐데 하며 언니를 내심 걱정했다.
하지만 이번 말씀을 통해 나의 믿음없는 마음의 자세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말로만 기도하면 다 이뤄주신다고 믿는다고 했지 마음은 혹시나 하는 걱정과
설마하는 의심이 있었던 것 같다. 훈련을 통해서 배우고도 말씀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참 많이 부끄럽다.
이제는 말씀을 대하는 나의 마음의 자세를 바꿔 말씀의 능력을 받도록 해야겠다.

문원희

2009-07-02 23:31:31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실 때에 그 사람의 가문이나 실력을 보지 않으신다.
오직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중심이 바른 사람을 쓰신다.
중심이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인 사람을 크게 쓰신다.

엘리의 두 아들은, 비록 제사장의 아들이라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무시하며,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다.(삼상2:12,13)

엘리야의 아들들은 제사장의 아들이라는 기득권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말씀을 무시하며
자기들 마음대로 살지 않았나 싶다. 그 아들들을 보며 나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득권을 가진
자녀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나 반성하게 되었다.
제자 훈련을 받아 겸손해지기 보다, 제자 훈련을 받았다고 교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나
요즘 깊이 반성하고 있다. 특히나 요즘 계속 겸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말씀을 읽어도
겸손에 대해서 많이 읽게 되는 것을 보니, 나는 도대체 얼마나 교만했었는지,,,,
기득권을 가져서 교만했던 엘리야의 아들들처럼, 나 또한 제자 훈련을 받은 기득권으로 교만하고
거만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지 너무나 반성을 많이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고 그 사람을 쓰신다. 내가 훈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나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지, 중심이 바르고 깨끗한지를 보시고
나를 쓰시는 것이다. 이제껏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훈련을 받았다는 훈련생의 신분을 가진
기득권으로 하나님 말씀안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던 내가, 모든 일에 하나님께 중심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을 두며 사는 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박은주

2009-07-04 02:20:10

벳세메스의 두 암소는 누구의 모습을 가장 닮았을까?
예수님의 모습이다..
두 암소가 걸어갔던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어갔던 길이요,
오늘날은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두암소나 예수님이나 큰 희생이 있었다. 하지만 오로지 희생만 있었을까? 두암소에게도 예수님에게도 지금 당장 답을 구할 수는 없으나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짐작이지만 ‘참만족’이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세상의 참 지혜로운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비로소 참 만족을 얻는다고, 무엇을 많이 소유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리석은 나는 아직도 뭘 더 못가져서 안달이다.
두암소와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근본적으로 내 삶을 다시 한번 되집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나는 무엇을 주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있는가? 나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과 기도를 나누고 있는가?를 말이다.
삶에서 공허함을 많이 느낄 때는 내가 희생하지 않았고, 나누지 않았을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잘못된 길에서 방향을 돌려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다시 갈 것을 다짐해본다

박재훈

2009-07-05 01:07:57

말씀 길은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다. 암소 두 마리는 자발적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바로 끝까지 언약궤를 끌고 이스라엘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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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선택의 기로에 선다.
행동으로든, 생각으로든 모든 것에 나의 선택 여하에 달린 삶의 연속이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 뜻을 물어볼 수 있고 이럴 때 하나님은 어떠실까 궁금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음이다.
묵묵부답하실 때도 많으신 알 수 없는 하나님이지만^^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하다.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움직이게 하시지 않고
생각해보고 하나님의 뜻을 느껴보고 고뇌해보고 그리고서 순종할 수 있도록
큰 기회를 주시니 말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음을 다시금 돌아보고 정비할 수 있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하신 하나님...
고민할 때마다, 괴로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그 뜻을 지향할 수 있는 작은 마음의 시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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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約の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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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難の正しい見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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