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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영광교회

겸손

이용규목사, 2008-04-21 17: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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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말씀//빌2:5-9

1.        주님의 마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겸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마음을 소개한 부분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 성경에서 온유는 겸손과 동일한 의미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마21:5)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표현하자면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겸손하니’로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셨다.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빌2:5-8) 예수님의 겸손은 얌전하거나 말이 별로 없거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잘하는 등의 소극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참 겸손은 세상을 살리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남을 높이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인데, 그 목적이 남을 높이기 위해서이다.(잠16:19, 빌2:3)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상대편을 높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은 자신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 같지만, 다음 순간 높이 올라갔던 상대방이 중력 가속도를 붙여서 나를 더 높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반드시 그대로 된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겸손은 모두가 승자가 되게 하는 윈윈의 결과를 늘 예비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법칙은 예수님께도 정확하게 적용이 되었다.
예수님은 높고 높은 하늘에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뛰어 내리셨다. 한없이 낮아지셨다. 하나님의 모습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 주인의 모습에서 종의 모습으로까지 낮아지셨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 받은 백성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올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힘껏 낮아지셨다. 그래서 우리는 일순간에 예수님 덕분에 영생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높아졌다.
널뛰기 원리 그대로 한없이 높임 받은 우리 또한 그 분(예수님)을 한없이 높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찬양자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분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5:13)
크리스천이 예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예수님 덕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혜의 무중력 상태에 있으면 안 된다. 자녀로 높임을 받았으면 또한 높아진 만큼의 중력으로 주님을 높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도 예수님의 겸손에 다음과 같은 복을 주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2:9)

2.        겸손의 축복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 하셨다.
겸손한 자는 기도 응답을 잘 받고(시10:17)
겸손한 자는 만족함을 누릴 것이고(시22:26)
겸손한 자는 넘어지더라도 주님이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시147:6)
겸손한 자는 아름답게 되고(시149:4)
겸손한 자는 풍성한 은혜를 받고(잠3:34)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따라오고(잠11:2)
겸손한 자에게는 존귀가 따라오고(잠15:33)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고(잠22:4)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사57:15)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동행하며, 축복하며, 그를 사용하신다.

3.        바울의 겸손
바울은 겸손의 증인이다. 그는 스스로 겸손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겸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엡4:1-2)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20:18-19)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바울의 삶과 가르침은 오직 겸손, 모든 겸손이었다.
바울은 겸손을 제자로서의 최고의 덕목, 능력으로 여겼던 것이다.
바울이 겸손을 이렇게 귀하게 여긴 것은 남다른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단히 교만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서 죄인과 악인과 교만한 사람은 비슷한 말이다.(참고; 시1:1) 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이었으니 교만의 도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그를 주님은 완전히 낮추신다. 말 위에서 교만의 극치를 달리던 그는 한 순간에 말 아래로 떨어져 눈까지 볼 수 없게 된다. 많은 사람을 잡아 끌고 가던 그가, 이제는 자기 몸 하나도 끌고 가지 못하는, 낮은 자의 신세가 되고 만다.
하나님은 어떤 약한 사람도 쓰실 수 있지만, 교만한 자는 못 쓰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에는 반드시 ‘겸손 훈련’을 시키신다. 모세도 광야에서 겸손 훈련을 40년간이나 받았고, 요셉도 노예 생활과 감옥생활로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의 지옥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진 자는 치시지만, 낮아진 자는 높이 쓰신다. 고난은, 하나님이 쓰시는 겸손 훈련의 귀한 도구이다. 인생에 고난이 왔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려고 겸손 훈련에 들어 가셨다. 무조건 낮아져라. 낮아질수록 좋다. 바닥에까지 내려가라. 광야까지 가고, 말에서 완전히 떨어지고, 감옥까지 가라. 이것이 겸손 훈련을 최고로 잘 받는 모습이다. 바울과 모세와 요셉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바울을 귀한 종으로 쓰실 때에도 몸의 지병의 가시를 없애 주지 않았다. 그는 늘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았다. 하나님이 그의 육체의 가시를 제하여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바울이 3번이나 간구했는데도 왜 응답해 주시기 않았을까? 간단하다. 바울을 교만으로부터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12:7-새번역) 우리를 교만으로부터 지켜 줄 최고의 지킴이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함’이다. 약함이 있는 사람은 교만해지다가도, 약함의 가시가 곧 깨닫게 해 주기 때문에 금방 돌아오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의 병이 낫지 않음에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약함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교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은, 비록 그것이 몸의 치명적인 가시일지라도 기뻐하며 자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겸손의 보물을 끝까지 지켜 주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두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세상을 향한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겸손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첫 번째 겸손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겸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 낮아지셨다. 이를 성경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은 종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섬김을 완성하고 천국으로 가셨다.
사람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은 종의 모습 즉, 섬김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 겸손의 모습은 하나님께 드린 겸손이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겸손의 참모습이었다.
겸손의 모습은 대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겸손은, 윗사람에게는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동료나 아랫 사람에게는 섬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의 이 겸손의 두 가지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천이 겸손을 잃어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 성품을 잃어 버리는 것이요, 결국 주님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겸손의 두 모습인 섬김과 순종을 교만에게 결코 빼앗기지 말자.  

36 コメント

최현숙

2008-04-21 18:48:30

[하나님은 어떤 약한 사람도 쓰실 수 있지만, 교만한 자는 못 쓰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에는 반드시 ‘겸손 훈련’을 시키신다.]
약함을 자랑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위대한 사람일 것이다. 나 자신을 보면 약함을 자랑하기보다는 드러낼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많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성경속에서 바울이 겸손을 매우 강조한 모습 속엔 반대로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얼마나 교만 했었는가를 말 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엔 참 교만한 사람이였던 것 같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교만했다면 세상 사람들도 그럴만하지! 하지 수긍했을 것이지만 나처럼 못난 사람도 없는데 교만을 갖고 있었으니 이런 나를 보면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교만한 사람보다 겸손한 사람이 좋다. 그 사람과 더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함께 시간도 보내고 싶다. 겸손한 사람을 친구로 갖고 있으면 왠지 든든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 훈련을 시키기 위해 어려운 환경과 고난도 주셨다. 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처럼 나를 찌르는 가시가 내게도 있는 것 같다. 이 가시만 없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도 많이 해 봤다. 하지만, 그 반대로 생각하면 이 가시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어 있지 않았을 것야. 맞아! 정말 그래…..한동안은 이 가시가 나를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 돌이켜 보면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할 수 있는 위치에 두게 하심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였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에서 전하는 자로 변했던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 같은 사람은 다르다. 나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 또한 얼마나 약한 사람인가?
그저 지금 이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주님의 마음을 닮길 원하는 것 뿐이다.
위로는 하나님앞에 겸손히….
옆으로는 섬김의 모습으로 겸손히…..
예수님께서 친히 본으로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서 육의 감정이 나를 조정 할려고 할 때마다 몇초간의 여유를 갖고 주님의 마음을 품을렵니다.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전한나

2008-04-21 22:41: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 온지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일주일동안은 시댁에 있다가 이번주 부터는 친구들도 만나고 할겸 친정에 왔다.
사실은 내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친정집에 알리지 않았다.
이유인즉 우리 엄마는 자식을 많이 낳는걸 싫어 하신다.
본인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힘들다면서 시집가면 자식을 낳지 말거나 낳아도 한명이상은 낳지 말라고 늘 말씀 하셨는데 그것도 내가 터울도 없이 임신을 해서 엄마는 크게 못마땅 할 것이 분명하기에 말을 하지 않았다.
역시나 엄마는 내 예상대로 마음이 안들으셨다.
지금도 애하나 잘 보지도 못하면서 대책없이 너 힘들게 임신을 했냐면서 머라 하신다.
엄마가 나를 생각해서 한 말인데도 그래도 엄마한테 그런말을 들으니 울음이 나오면서 속상하고 다시는 집에 안온다고 연락도 하지 않을꺼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말을 할수가 없어서 그냥 방에 들어가서 혼자 울었다.
울면서 온갖 안좋은 생각이 들어서 더 슬퍼 졌는데 방안에 성구 액자가 하나 눈에
보였다.
사랑하는 자여 내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갑자기 엄마의 마음이 생각이 나면서 엄마가 나를 위해서한말인데 말하실때 표현이 잘못 되어서 그랬을꺼야 하면서 아까 엄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이 잘못되었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눈치를 챗는지 그런의도가 아니었다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자식이 떡을달라는데 돌을 줄 엄마가 어디있냐고 고기를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는 부모가 어디있냐고 하시면서 너가 몸도 마른데 애하나 제대로 업고 다니지도 못하는게 넘 안쓰러워서 그래서 속상해서 그랫다고 하신다.
내가 만약 아까 화를 참지 못하고 엄마한테 퍼붓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화가 나더라도 조금만 참고 목사님의 위의 말씀처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말씀을 가지고 산다면 남에게 상처주는말을 지금보다는 조금이라고 줄일수 있을것 같다.

황미

2008-04-22 02:05:49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과 섬김을 !
머리로는 알면서도 아직도 내가 살아 바보 처럼 살 때 가 너무
많습니다. 지금의 모든 시간들이 나에게는 값 진 훈련임에 틀임이
없음을 알면서도 내내 마음이 우울 합니다.
"예수님의 피" 로 사탄아 물러가라 외쳐 봅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며 내게 주신 말씀임이 뼈 속 까지 느껴 집니다.
어제 온 종일 불평하며 한 목사님께 서운한 감정이 오늘 아침까지도
잠을 설치게 하며 나를 슬프게 했었습니다.
오전 예배를 드리며 한 목사님의 말씀이 나를 울리고 말았습니다.
숨겨둔 내마음이 들통 난 것 입니다. 저를 위로하며 달래셨습니다.
한국에 와서 마음 고생을 너무 많이 한 저의 마음을 너무 잘 아시는 가족
같은 목사님께서 하신 한 마디에 내 믿음은 어느 덧 사탄에게 빼앗겨
불평 하며 분노 하며 슬퍼 했 던 것 입니다.
이 곳 이 기도원이 아니었더라면, 예배를 오늘 드리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도......상상 하기도 싫습니다.
회개 합니다. 회개 했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많이 부족한 저를 이모양 저모양으로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작업을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더욱 겸손한 제가 되기를, 온유한 제가
되기를 그래서 나보다 약한 자를 진실한 마음으로 섬겨주는 주님의 모습
이고 싶습니다. 너무도 약한 저를 용서 하여 주옵소서 주님!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예수 예수 예수님이신 것 을 더욱 깊이 새겨 봅니다.
"고난이 유익"이라 주를 보라.........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오직 주만 바라
보며 순종 하는 "나" 이고 싶습니다.

서조은

2008-04-22 07:10:51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고후12:7-새번역)

바울의 가시를 들으면서 그나마 내겐 진짜 작은 가시를 주셨구나...
하면서 감사했습니다.
교만으로 치자면 바울하고 견주어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인데...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면서, 정말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도 낼 수
없는 귀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늘의 보좌에 계시던 분이 천하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더러운 말구유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리고 죄인들과 같이 십자가를 지시고...
...........
겸손의 겸손을 보여주신 예수님...
그런데 이것이 다 나를 높이기 위해서라니요...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중고등부때 강원도 산골로 수련회를 가서 반나절동안
다리에 목각을 대고 장애인의 모습으로 그 산골마을을 다니며
장애인 체험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시골이라 사람이 없었는데, 가끔씩 마주치는 한두사람이
저를 뚜러져라 쳐다보는데, 어찌나 창피하던지요...
그 뒤론 멀리서 사람이 오는 모습이 보이면,
가는 길을 멈추고 절둑 거리는 다리를 감추었습니다.
반나절이 어찌나 길던지요...
그리고 그때 그 체험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모습인 순종,
순종하나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저의 삶을 뒤돌아 보며,
앞으론 제대로 살아가기로 다짐 했습니다.




박빛나

2008-04-22 08:03:17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남을 높이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인데, 그 목적이 남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위의 구절에 깨짐을 받았습니다.
겸손은 그 목적이 남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실은 겸손도 결국은 나를 위해서 라는 생각을 많이했습니다.
아직도 내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흔히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저도 그렇구요.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너잘되라는 소리가 참 많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제 동생과 대화를 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거든, 잘 들어두는게 좋아. 라고... 설교를 하고 있지 뭡니까! 아이고~하나님!! 저는 또 동생의 약한 부분에 침을 놓은 꼴이 되었을지도 모른답니다. 무척이나 마음이 여린 아이거든요. 동생에게 제 잘난척을 한 겁니다. 분명. 그건 동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한 거죠. 나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부터 깨져서 남을 위해서, 그것도 남을 높이기 위해서 라는 생각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사고의 벽이 가슴을 때립니다. 왜그렇게 남을 높여주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들었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도 이기는게 살길이요, 경쟁시대에서는 잘난자가 왕이라는 생각의 씨앗이 내린 뿌리가 꽤나 깊었었지 싶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우리 예수님 처럼, 마음의 눈에 하트를 새기고 사람들을 대하면, 겸손의 미덕을 실천할 수 있을까..라구요. 하트 콘택트렌즈를 끼고 살면 분명 하트 왕국으로 보이겠죠?

김 정숙

2008-04-23 01:39:50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가라 말씀하시는 목사님
들어며 나의 모습을 돌아 보며
자기 자신만 생각 하는 마음과 사람을 생각 하는 마음과
주님을 생각 하는 마음으로 나눌때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때때로 변화되는 사람의 마음속을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안에 계셔서 다 알고 계심니다.
널뛰기 비유를 통하여
내가 남을 높일 때 나도 같이 높아 질수있지만
내가 내려 갈때 올바른 마음으로 바로 내려 갈때
상대도 바로 올라갈수 있다는 비유를
잠깐 생각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서는 당당한 모습으로
사람을 섬김에는 온전한 순종의 모습이 되기를 사모 합니다.
한주일 전에 기도로 섬기는 집사님의 모습을 적어 봅니다.
이사 문제를 놓고 기도 하면서
일본 부동산 법의 까다로운 여러 조건 때문에 잘 되지 않아서
이사 날짜 때문에 걱정하며 안타까워 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순종과 말씀에 바로 선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시는 곳으로 이사 하려
마음을 비우고 준비 하고 계시다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았읍니다.

오늘 새벽 예배 시간에
목사님은 진짜 천국의 비밀은 "예수님" 이시라고 말씀을 주실때
나도 모르게 코끗이 찡하며 기도 시간 내 눈물이 나오는
아픈 마음이였읍니다.
그 집사님 생각 을 잠시하며 도늘 전화를 걸어 보았읍니다.
아직 연락이 없다며 속회를 다녀 왔다고 밝은 목소리 였읍니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라고 전화를 끈고
돌아서는 시간 다시 전화가 왔읍니다.
하나님이 좋은 곳에 좋은집으로 주셨다 며
감사 하는 집사님과 어린 딸의 목소리가....
날마다 순종하며 겸손하며 기뻐하는
예수님 더 닮아 가기를 소망 합니다.













이정미

2008-04-23 01:49:21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진 자는 치시지만 낮아진 자는 높이 쓰신다.
고난은 하나님이 쓰시는 겸손 훈련의 도구이다.
인생에 고난이 왔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려고 겸손훈련에 들어가신다.
무조건 낮아져라..
하나님을 알고 내 마음중심이 하나님을 두려워 질때 그때 가장 처음
내게 변화를 준 것이 겸손해야겠구나~~ 라는 마음이 생겼다.
내게 보여지는 모든것에... 내가 얼마나 교만한 마음으로 지냈는지...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몰랐다. 말씀이 내안에 들어오기 시작한후 나는
그동안의 나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나의 말한마디,행동하나에
언제나 조심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내가 나를 나타내며
잘난척을 할때와, 내가 정말 진심으로 낮추어 다른 사람의 높일때 오히려
그 효과는 예전에 모습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나를 높여주는것이였다.
참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남을 높이는 것이다.
오늘 속회예배를 드렸는데 속 식구 한명이 이런,간증을 하였다
자기는 교회에 다니는 것은 가정의 평화와 그냥 따라다닐정도의
믿음이였다 결혼후 줄곳 ...
그런데 남편의 진정한 믿음과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과 본이 되는
삶으로 크리스찬의 본이되니 자신도 모르게 내가 이럴수는 없지 하면서
교회의 모임을 참여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활을 하기 시작을 하였다고
한다 정말 은혜스러운 말이였다. 대부분 여자들이 더 믿음이 좋은 편인데..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그삶이 변화하는것은, 정말 얼마나 생활속에서 바른 생활과
몸에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왔겠는가?
진정한 겸손은 세상의 속의 작은 겸손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삶속의
겸손을 통하여 크리스천의 향기로 주변의 믿지않은 자는 물론 믿는자에게도
본이되어 그모습을 통하여 내가변화하고 다른사람에게는 덕을 세우며
예수님의 참겸손을 닮아가는 삶이라 믿습니다

김영희

2008-04-23 03:37:29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
자신이 있는 힘을 다해 상대편을 높혀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은 자신이 한없이 낮아지는것 같지만, 다음 순간 높이
올라갔던 상대방이 중력 가속도를 붙여서 나를 더 높혀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도 바꿀수 없다. 반드시 그대로 된다."

주목자 섬김이 수요일로 옮겨지는 결정으로 이게 얼마만인가 !
늦장을 부리게 된다. 12시 예배를 12시30분 예배로 착각하고 느긋하게,
여유있게 교회에 도착하게된다.입구에 들어서자...갈릴리 마을!!! 어라!
목사님 올라 오시기전 마지막 찬양...에라 모르겠다!오늘부터 피곤한 얼굴
하지않고 제대로 설교말씀 에 집중할수 있는 많은 은혜의 시간이 될줄 알고
좋아했었는데...철판 깔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 항상 할랑 했었던 자리가
나중보니 꽉 짜서 앉게되어 모두에게 미안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_ -;;;
다음부턴 30분전 미리 나가기로 단단히 마음을 다지는 시간이었다.
먼저 나가는 사람이 우선이다. 록펠러 어머니 교훈을 떠올리면서...
오늘은 어떤 말씀을 주실까?!
나는 늘 말씀을 비유로 감격스런 목사님의 탁월한 철학을 기다린다.
아니나 다를까 널뛰기 원리를 비유로한 철학중 철학의 설교 안에서 새로운
겸손의 원리를 깨달음과 함께 찾아내게 된다.
예전에 언니와 함께 진해 벚꽃놀이를 갔던적이 있다. 그 당시에 꽃놀이를 온
관광객들을 즐겁게 보내게 하기 위한 또 다른 놀이가 있었다.
현지에서 한복을 빌려주며 갈아입고 하는 그네뛰기,널뛰기,등 1.2.3등을 뽑아
상품을 주는 민속놀이였다. 놀이에 들어가... 하고간 스카프로 한복치마를
야무지게 동여매고 널뛰기를 한 기억이 난다.
한참을 올랐다 내렸다...나중 상대방이 발란스를 잃고 나동그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고의가 아니었지만 미안한 생각에 심판보는 사람에게 다시한번
하게 해 달라고 이긴 내가 때를썼다. 그 아저씨 말이 더 웃겼다.
이기기 위해 하는 놀이를 이기고 다시하게 해달라니 참 이상한 사람 다보겠네!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상한게 아니라 나는 긴 한복 치맛자락을 동여매고
했고, 상대는 그냥하다 긴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에 공평하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땐 분명 내가 별종으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 자녀로 예비되어 있었던 나 였는지도....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상대를 높이 올렸다 떨어지게 하라는 말씀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다.같이 호흡하며 발란스를 잘 맞추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해 주신다. 설상가상 어느 한쪽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내려온
한쪽 역시 다시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온 그 자리에 멈추게 된다.
높여 주고 낮아져라, 나를 낮추는 겸손이 곧 나를 높아지게 하는것이 아닐까?!
이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이 아닐까?! 란.....순종 이 아닐까?!란...
나를 위해 주인의 모습에서 종의 모습으로 한없이 낮아지신 예수님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을 위해 교만에서 겸손으로 바뀐 바울처럼 치명적인
병의 가시를 안고도 범사에 감사할줄 아는 내가 되어야 겠다는 큰 희망과
소망을 품는 깨달음의 시간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내 약함을 자랑할줄 아는
제자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선포하는 내가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또한 내가 항상 기도드리고 있는 예수님 닮아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 을 택한
기도는 앞으로도 계속할것이다. 교만에서 탈출하기 위해...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영적인 찬양자가 되길 소망하며 주님께 간구한다.
교만은 싫습니다. 섬김과 순종의 겸손한 자의 능력을 인도하소서...주님 !

탁성아

2008-04-23 03:41:45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고후12:7-새번역)
우리를 교만으로부터 지켜 줄 최고의 지킴이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함’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신 목적을 깨닳을 수 있었던 말씀이었다 .
가시가 박혀 있는 지금도 교만할 때가 가끔 생기는데
나에게 가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아마 교만에 풍덩 빠져 허우적 대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
나의 약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었구나 .. 하는 깨닳음에
너무 큰 감사가 생겨났고 감동이 일어났다 .

겸손한 자는 기도 응답을 잘 받고(시10:17)
겸손한 자는 만족함을 누릴 것이고(시22:26)
겸손한 자는 넘어지더라도 주님이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시147:6)
겸손한 자는 아름답게 되고(시149:4)
겸손한 자는 풍성한 은혜를 받고(잠3:34)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따라오고(잠11:2)
겸손한 자에게는 존귀가 따라오고(잠15:33)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고(잠22:4)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사57:15)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동행하며, 축복하며, 그를 사용하신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하던 기도를
이제는 겸손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다 .
겸손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지혜는 보너스로 주시니까 ..말이다 ..
겸손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더 큰 사랑을 받는 내가 되어야겠다 .
겸손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제자가 되어야겠다 .

김수영

2008-04-23 07:54:13

고난은 하나님이 쓰시는 겸손 훈련의 귀한 도구이다.
무조건 낮아져라. 낮아 질 수록좋다.

하나님의 자녀는 감수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데
마음 속에 끌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목사님 말씀처럼 무조건 참고,참고 또 참으면
머지않아 고난이 행복으로 바뀌겠지...
그리고 나의 교만도 겸손으로 바뀌는 날이 멀지 않았으리....

최홍근`

2008-04-23 16:18:03

이번주 일요일에는 정말 십일조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었다.
이번에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지 못해서 급여가 적게 들어 와서 십일조를 낼까 말까 많은 고민이 됐었다. 일요일 아침에 교회가기 전에 정기권을 샀는데 이제까지는 통근으로 샀던것을 이번에는 학생할인으로 샀었다. 처음에 정기권을 사기 전까지만해도 할인이 많이 되면 꼭 십일조 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할인을 해보니 5000엔정도 할인이 돼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돈이 더 많아 지는데 하는 악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처음에는 이번엔 그냥 십일조 내지 말고 감사헌금으로 대신하자고 생각하여 감사헌금을 준비 했었다. 그런데 예배를 시작하고 조금 있으니깐 왠지 찝찝한 느낌에 그냥 감사헌금을 내려고 썼는 것을 고치고 십일조를 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였지만, 십일조를 내지 않을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박유진

2008-04-24 00:11:00

"겸손은, 윗사람에게는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동료나 아랫 사람에게는 섬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의 이 겸손의 두 가지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전에 주변을 보지 않고, 나만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도 주변을 많이 배려하는 것이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배려해서 신경을 써주면,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 자신을 설교말씀을 통해서 되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레스토랑이나 가게에 갔을 때 (일본은 더욱이 손님에게 아주 깍듯이 대하니까), 마치 그들이 나를 왕처럼 대접해주는 모습에 더욱 거만을 떨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요즘은 레스토랑에 가도, 다 먹은 후에 접시들을 가지런히 모아놓고 나오곤 한다. 이전에는, 종업원들이 알아서 치우겠지, 그게 그사람들 일인 걸..하고 생각하던 것이, 이렇게 접시를 모아주면, 두번 일할 것 한번만 일하면 되기 때문에 훨씬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내가 대접받는(!) 그런 위치에 있으면, 받으려고만 하지,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목이 곧은 백성인지. 늘, 겸손의 모습인 순종과 섬김을 마음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겠다.

우리 아빠는, 내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사업이 꽤 잘 나가셨다. 그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져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시게 되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상적으로 모은 돈은 정말 한푼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아빠는 나중에 말씀하신다. 그 때는, 정말로 이런 고난은 없을 것 같다는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아빠는 정말 한없이 낮아지셨고, 지금의 겸손의 모습을 가지게 되신 것 같다. 나는 아빠가 교회에서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께 절대로 순종하는 모습과,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고 섬기시는 모습을 보고 배우게 되었다. 그런 아빠에게는, 당뇨병이라는 가시가 있다. 사업이 힘들고 어려우셨을 때, 너무 무리를 하셔서 생기신 병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 병때문에 불평을 하지 않으신다. (적어도, 나는 내 앞에서 아빠가 불평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음식을 조절해야 해서, 남들이 먹는 맛있는 음식들을 못 먹고, 늘 약을 상비해서 다니셔야 하는데도, 정말로 힘들고 불편한 병일텐데도 말이다. 나는, 그런 아빠에 비하면 아직도 많이 멀은 것 같다. 다음주에 일주일동안 놀러오는 남동생에게, 섬김의 모습을 가득 보여줘야 겠다.

한영진

2008-04-24 00:49:17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상대편을 높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은 자신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 같지만, 다음 순간 높이 올라갔던
상대방이 중력 가속도를 붙여서 나를 더 높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반드시 그대로 된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겸손은 모두가 승자가 되게 하는
윈윈의 결과를 늘 예비하고 있다.]

겸손은 하나님이 주신 영혼의 이미지라고 하셨는데…
지난 주 말씀을 받은 이후로 나름 진지하게 겸손에 대해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 주 말씀을 듣고 역시 내게 필요한 때에 딱 맞는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새벽 예배 때,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쓰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교만한 사람’이라고 들었을 때 쇠망치로 머리를 되게 얻어 맞은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늘 내가 교만한 인간이라고, 그게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새로 듣고 깨닫게 되었지만, 알고나니 당연한 진리 앞에서
깊은 수렁에 빠진것 처럼 의기소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내가 생각하고 있는 ‘교만’은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일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몸부림을 치듯이
내 안에서 대충 뭉뚱그려져 애매모호한 교만의 모습을
다시 정립해 보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나 다시 찾아 보았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다.
생소한 정신의학 용어 ‘악성 나르시즘’을 흔히 우리는 ‘교만’이라고 부른다.
교만은 악의 뿌리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교만을 첫째가는 죄로 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교만이 죄라 했을 때 그들이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어떤 일을 잘 이루고 난 뒤에 누릴 수 있는 온당한 성취감이 아니다.
그런 교만은 정상적인 나르시즘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함정은 있을지 몰라도
건강한 자신감의 일부이자 현실성 있는 자기 가치의 일부인 것은 분명하다.
교만이 진짜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내적 죄성과 불완전함을 터무니 없이
부정하는 그런 교만, 날마다 뻔히 보이는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려 주어도 그것을 극구 부인하고 심지어 반격까지 하려드는
그런 파렴치하고 하늘 높은줄 모르는 교만이다.」
내가 생각했던 교만은 단순하게도 ‘잘난체 하는 것’이었다고,
나의 기도의 반 이상은 회개이고,
내게 있는 약함, 큰 가시도 이젠 감사드릴 줄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나도 뿌리까지 교만하지는 않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도 교만이라고 화들짝 놀라고……
이런 거듭되는 생각의 혼란을 이번 주 말씀이 잠재워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내가 뭐 앞의 책의 저자처럼 정신의학 박사도 아닌데
내 심리와 정신을 깊이있게 분석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아버지께서는 나의 중심을 보시고, 아시니 천만 다행이 아닌가.
잘난체도 교만이고, 나는 내가 교만할 때마다 늘 그걸 일깨워 주시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실 성령님께 더욱 의지하여 매일을 살고자 한다.
교만과 마찬가지로 불투명했던 ‘겸손’의 의미가 이번 주 말씀으로
결과적으로 내 안에서 확실하고 뚜렸해진 것이 나의 숨통을 열어 주었다.
특히나 널뛰기의 비유는 겸손의 이미지를 너무나 정확하게 보여 주었다.
나는 내가 오직 주안에서 높아지길 바라고
하나님 일에 쓰임받길 원하면서도
그걸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이젠 겸손한 자에게 약속된 그 모든 것을 다 받고 싶은 욕심까지 생겼으니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낮아져야만 하겠다고 결심을 한다.
좀 더, 좀 더 잘 섬기고 매일 더 나은 순종의 모습을 보이는 내가 되길 원한다.

홍은미

2008-04-24 01:10:24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상대편을 높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은 자신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 같지만, 다음 순간 높이 올라갔던 상대방이 중력 가속도를 붙여서 나를 더 높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반드시 그대로 된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겸손은 모두가 승자가 되게 하는 윈윈의 결과를 늘 예비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면 정말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된다. 음식 하나하나 가져다 줄 때마다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상대방 기분까지 나쁘게 하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 신경쓰지 않고 큰 소리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등등.. 그러다 보니 그동안 식당에 갔을 때의 내 모습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아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또는 '나도 이런 적이 있을텐데..앞으로는 절대 조심해야겠다'라든가... 겸손한 손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서비스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내가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할 때 함께 높아질 뿐 아니라 서로 존중해주는 마음에 기쁨도 생기는 것 같다.

김선아

2008-04-24 01:27:50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셨다.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빌2:5-8) 예수님의 겸손은 얌전하거나 말이 별로 없거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잘하는 등의 소극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참 겸손은 세상을 살리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남을 높이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인데, 그 목적이 남을 높이기 위해서이다.(잠16:19, 빌2:3)

저는 언젠가부터 자기 능력을 잘 어필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요즘 시대에 맞는 모습이라 생각하며 그렇지 않는 것은 바보스러운 모습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던 저에게 이번주 말씀은 많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 낮은 저를 왕같은 제사장이라 높여주시고 섬겨주신 모습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또한 그동안 얌전한 모습과 소극적인 모습이 겸손의 모습이라 생각했던 것에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제자의 모습으로 윗사람에게는 순종의 모습을 나타내고 동료나 아랫 사람에게는 섬기는 모습으로 항상 겸손하길 위해 노력하는 제가 되길 기도합니다.

소대섭 전도사

2008-04-24 21:40:02

>> 크리스천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상대편을 높여 주는 것이다.

작년에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여기 저기 인사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함께 식사도 하고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 저를 교회로 인도했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덕담을 나누다가 제게 '한 가지만 고치면 가정이 순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것은 말로 저의 말투였습니다. 제 말투가 때때로 너무 거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남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저의 좋은 장점들을 가린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매 학기가 시작되면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학기말이 되면 함께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는 왜 그랬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저의 말투는 그리 겸손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때때로 가정에서 그런 저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고, 교회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그저 거만한 말투와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쑥 하고 입에서 빠져나와 버릴 때가 있습니다. 특히 상대가 묻지도 않았는데.. 잘못을 지적할 때가 종종 있어서 지나고 나서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고치기 위해서는 정말로 널뛰기에서 상대를 높이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낮아 져야 하듯이, 제 잘못된 말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겸손이라는 열매를 제 인생에 맺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있는 힘을 다해 겸손을 연습해야겠습니다.

신정은

2008-04-25 03:52:01

하나님은 어떤 약한 사람도 쓰실 수 있지만, 교만한 자는 못 쓰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에는 반드시 ‘겸손 훈련’을 시키신다. 모세도 광야에서 겸손 훈련을 40년간이나 받았고, 요셉도 노예 생활과 감옥생활로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의 지옥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진 자는 치시지만, 낮아진 자는 높이 쓰신다. 고난은, 하나님이 쓰시는 겸손 훈련의 귀한 도구이다. 인생에 고난이 왔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려고 겸손 훈련에 들어 가셨다. 무조건 낮아져라. 낮아질수록 좋다. 바닥에까지 내려가라. 광야까지 가고, 말에서 완전히 떨어지고, 감옥까지 가라. 이것이 겸손 훈련을 최고로 잘 받는 모습이다. 바울과 모세와 요셉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사실 나는 절대로 교만해질 수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늘 생각하면서 지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어디선가 모르게 나의 교만함이 슬금슬금 나올때가 종종 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일을 처리할 때 있어서 이런 나의 교만함이 드러날 경우에는 영락없이 100프로 바닥으로 곤두박칠치는 과정을 수 없이 반복해 왔다.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 그 바닥을 치고서야 무릎꿇고 회개를 하고 겸손해 졌다. 이것이 바로 겸손훈련임을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깨닫는다.. 이 훈련을 통해 나는 다시 그 겸손함으로 일을 하고, 바로 그 때 비로서 그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며 게다가 내가 높아지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다..
그러나..이런 원리를 잘 알면서도 겸손한 마음과 행실을 지키기란 참으로 어렵다... 특히,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은...더욱 그렇다.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누가 더 높은지 키재기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 역시 좀 더 높아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할 때도 많았음을 회개한다..
이제..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을 본받길 원한다..세상을 향한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겸손. 이 두가지 겸손을 교만으로부터 빼앗기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드린다..

최승우

2008-04-25 04:00:00

오늘 속장 세미나 시간에 일이다.
목사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소개하라 하시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기에 남들 앞에서 창피해서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내세울 것이 없기에 교만할 수도 없는 것 같다.
특별히 어떤 달란트를 가진 것도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말 어쩔 때는 그 약함에 한없이 내가 무너질 때도 있다.
바울은 약함을 자랑처럼 고백하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고백할만큼 당당하지도 않다.
그치만 약하기에 하나님밖에 의지 할 수가 없다. 나는 이제 안다.이 약함이 있기에 나는 큰 축복이 있음을 믿는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우리 주님의 특기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제 더 이상 나의 약함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그저 이렇게 나를 만들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를 통해 어떤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실찌 기대가 된다.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교만의 모습으론 어떤 쓰임도 받을 수 없다.오직 그 분께 쓰임 받으려면 그저 남을 섬기고 남을 높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만큼은 자신있다. 내가 잘난 것이 없기에 나는 남을 칭찬하는 일에 꺼리낌도 어려움도 없다.그저 보이는데로 가식적이지 않은 진심으로 남을 칭찬 할 때 나는 기분이 좋아지고 그 일이 내일처럼 마음이 신난다. 그 뒤에 어떤 흑심도 없기 때문이다.
정말 늘 말씀에 순종하는 삶..말씀대로 살려는 몸부림과 남을 늘 배려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은 평생 내가 해야 될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정향연

2008-04-25 05:54:15

***하나님은 어떤 약한 사람도 쓰실 수 있지만, 교만한 자는 못 쓰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에는 반드시 ‘겸손 훈련’을 시키신다. 모세도 광야에서 겸손 훈련을 40년간이나 받았고, 요셉도 노예 생활과 감옥생활로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의 지옥훈련을 받았다.***

이번주에 겸손의 설교를 듣고 일주일을 겸손을 마음에 새기며 생활했더니,나의 오만함이 많이 보였다.,..
특히 너무 놀란적은 ..회사에서 새로운 회사의 자료를 입력하기 위해 조사를 하던중 그 회사가 작년것도 결산이 안된것같다는 느낌이 들어 ,회계선생님께 물어보았다...당연히 나는 컴퓨터 앞에 앉은 채로 말이다..
선생님은 나의 질문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내자리근처에 와서 서서,두팔을 내리고..차렷 ...과 같은 자세로 내 질문에 공손히 대답하여 주셨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냥 난 자리에 앉은채로 설명을 들었는데.
끝나고 보니 ,내가 참 실수했다는 생각도 들었고,공손히 서서 설명을 해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나의 오만함을 다른사람의 겸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것 같았다...
이번한주는 겸손한나..라는 제목으로 마음가짐을 먹고 사회생활을 했을떄
모든것들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같은 상황이라고 영적분별력을 가지고 생활할때 느끼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겸손은 이번 한주만 실천하기에 너무나 아깝다...잊지말고 늘 내자신을 겸손의 채찍질을 하는자가 되고싶다..

이동훈

2008-04-25 09:57:42

참 겸손은 세상을 살리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남을 높이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인데, 그 목적이 남을 높이기 위해서이다.(잠16:19, 빌2:3)

겸손하기란 참 어려운 것 같다. 말씀을 듣고 제자훈련을 받고 책을 읽으면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몇 번씩 하지만 역시 대화중에 은연히 자신을
내세울려는 마음이 내게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겸손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 보다 한없이 낮은 우리를
섬기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을 보면 만민을 섬기려 하셨기 때문에 만민의
참 왕이 되신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난 해를 세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녀로서 좀 더 겸손하고
남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대화중에 은연히 자신을 내세울려는
마음이 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가져야겠다.

이진애

2008-04-25 10:13:51

예전에.. 내게 주신 가시를 생각하며.. 누구보다도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했을 바울을 떠올리면서 억지로(?) 위로를 삼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나를 위로해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남을 높일 수 있는 겸손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으니 감사한 마음이 든다. 물론 지금도 그 가시를 거두어주셨으면 하는 소망이 아주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부족한 것이 워낙 많은 사람이라 세상적 기준의 교만함은 많이 없는 것 같다. 내세울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그래서 내가 교만하다는 생각은 사실 많이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어떤가?
음.. 어릴 때부터 나는 교회에서 칭찬을 많이 받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새벽예배에 나갔으니 단연 어른들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칭찬으로 이어져 졸지에 어릴 때부터 믿음 좋고 홀리한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 같다. 내게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셨기에, 또 갑자기 닥친 어려움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마도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내가 교회를 더 좋아한 게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그다지 나쁜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어느 틈엔가 내 마음에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그 교만이 사회생활에도 이어져 내가 옳은데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이 나를 많이 힘들게 했고, 나는 선하고 저 사람은 악하다는 식의 기준도 분명치 않은 이분법적 사고로 나 스스로를 교만의 소굴로 몰아넣으면서도 항상 피해자는 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기도를 할 때도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사람을 붙여 주십니까.. 저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식으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뻔뻔스럽게 항상 나를 선한 위치에 두었었다.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목사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화도 잘 내지 않는 편이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아니다 등등.. 나도 모르게 갖고 있던 내 안의 교만들이.. 한꺼풀씩 허물을 벗으니.. 부끄럽고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오늘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지체로부터 지금 힘들어하는 부분을 입으로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아뢰라는 선의의 충고를 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여러 사람 붙잡고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내게 충고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은 탓에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낯설고 얼굴까지 살짝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커다란 교만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견디기 힘들어 하는 어려움, 부족함, 가시, 인간적인 약함 등이 내게 없었다면 내가 얼마나 통제 불가능한 교만에 빠져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정말 말뿐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나온다.
지금도 살짝만 띄워주면 더 높이 올라가려는 교만의 뿌리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꿈틀대고 있지만 내게 주신 가시로 인해 그 뿌리가 줄기까지 차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이제 가시 때문에 주님을 원망하는 일은 없다. 감사만 있을 뿐.

박재훈

2008-04-25 10:31:04

>>예수님은 높고 높은 하늘에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뛰어 내리셨다.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높아졌다.

삶에서 참 어려운 부분이 겸손인 듯 하다.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겸손함을 겸비해야하니, 적절한 조화가 애매하게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겸손하기 위해서 정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을 했다가도 그런 내 모습에 어느 새 자존감은 사라진 채, 못난 자신을 탓하게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번 주에 중요한 검증테스트가 있는 터라, 지금 같이 일하는 H사 사람들도 우리 멤버들도 긴장 속에서 그 테스트가 무사히 시간 내에 끝나도록 일하고 있었다. 얼결에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파트를 내가 담당하게 되었는데, 품질이 불안정해서 실시 불가능한 항목이 있었는데, 되지도 않는 걸 붙들고 H사 직원은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보고 나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퇴근도 못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나에게 이런 저런 사항을 묻더니만, 1시간도 넘게 나를 그렇게 기다리게 만들고는 나중에는 우리 팀 리더에게 몇 마디를 던지고는 포기한 것 같다.
결국 그 항목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날 안에는 실시할 수 없으니 리더가 퇴근해도 좋다는 것이다.
순간, 그 H사직원에게 화가 났다. 상황이야 어쩔 수 없지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한 마디도 못할까 싶었다. 되지도 않는 것 붙들고 엄한 나만 기다리게 한 게 짜증스러웠다.
그냥 나올까 하다가, "今日いろいろ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니, "いや~長い時間、待たせてすみません。"하고 꽤나 멋적게 웃어줬다.
사실 그 사람도 나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은 있었던 듯하다. 말수가 없는 사람이라 말을 못했을 거 같은데, 내가 먼저 건넨 인사 한마디가 사과의 말로 돌아왔다.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겨주시기 위해 그 높은 곳에서 낮고 낮은 모습으로 임하여 주셨으니, 그 은혜에 따라 우리 모습도 낮은 자의 삶을 살아야겠다.
낮은 자의 삶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나를 위해 낮아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하루에 한 가지씩 겸손의 모습을 나 스스로에게 또 주위 사람들에게 나타내보자.

김명화

2008-04-25 10:33:33

바울의 겸손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엡4:1-2)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20:18-19)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바울의 겸손에는 수없이 많이 적혀 있고 또 그렇게 지켜왔다.
나에게는 어떤 겸손이 있는지 물어 보았을 때 대답은 민망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나는 주님이 주시는 겸손을 간직하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가 숙여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부터 속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낮아지고 낮아져서
속원들을 높여주고 가능성을 칭찬해주며 힘들 때 함께 할 수 있는
속장이 되기 위해서 더욱더 겸손을 삶으로 실천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사역훈련에 충실히 행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겸손을 배우고 겸손을 알아 가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김헌규

2008-04-25 15:15:57

하나님은 어떤 약한 사람도 쓰실 수 있지만, 교만한 자는 못 쓰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에는 반드시 『겸손 훈련』을 시키신다. 모세도 광야에서 겸손 훈련을 40년간이나 받았고, 요셉도 노예 생활과 감옥생활로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의 지옥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진 자는 치시지만, 낮아진 자는 높이 쓰신다. 고난은, 하나님이 쓰시는 겸손 훈련의 귀한 도구이다. 인생에 고난이 왔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려고 겸손 훈련에 들어 가셨다. 무조건 낮아져라. 낮아질수록 좋다. 바닥에까지 내려가라. 광야까지 가고, 말에서 완전히 떨어지고, 감옥까지 가라. 이것이 겸손 훈련을 최고로 잘 받는 모습이다. 바울과 모세와 요셉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지난주에 제자훈련 과제물의 QT가 요셉의 노예생활에 대해서였는데, 저는 요셉을 바라보면서 그가 왜 노예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의 형통함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노예생활을 통해 겸손훈련을 시키신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는 요셉을 질투한 형들의 시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리플에 몇번인가 적었습니다만, 현재의 저는 비공식적인 실업자상태입니다.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없이, 다음 프로젝트의 대기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견나가 있는 회사에서 알게모르게 눈치도 보이고, 제 자신도 많이 위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예전에 일이 많아서 일주일에 몇번씩 밤을 새워가면서 일하고,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을 관리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일이 바쁜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불평도 하고, 회사를 원망하기도 하고, 스스로 능력이 많아서 일을 하는 줄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제 생각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몇번인가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기도 하자,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즈음 저는 무슨 일이든지 맡겨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만약 일이 바빠서 일요일날도 출근을 해야 한다면, 제자훈련은 어떻게 해야하는 마음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일도 하고 싶고, 제자훈련도 끝까지 결석하지 않고 졸업하고 싶은 마음사이에서 갈등중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빠지지 않아도 되는 안 바쁜일을 주시든지, 바쁘더라도 제자훈련을 졸업한 다음에 바쁜 일을 달라고 기도를 하는중인데, 좀처럼 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들은 후, 요셉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훈련을 시키시는 이유와 목적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 보며, 현재의 저는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은연중에 현재의 상태를 조급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제자훈련을 받는 중에 있는 훈련생의 신분임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마치 무슨 신앙적으로 많이 성숙한 사람인 듯, 자신을 과신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낮아질 수 있도록 제 자신을 많이 다스려야겠습니다.
윗사람에게는 순종할 수 있고, 동료나 아랫사람에게는 섬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많이 깨닫습니다.
제 자신이 많이 낮아지고 죽어져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주님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인선정

2008-04-25 21:37:35

얼마전 이소연씨가 한국인 최초로 우주로 날아가 우주정거장(!!!우와!!)에 머물다 지상에 돌아왔습니다. 소련의 우주선은 미국의 우주왕복선처럼 우주인을 친절하게 지상에 내려다 주지 않더군요. 어디에 떨어질지 조금 불안하고-_-?? 사막 한가운데 낙하산에 의지에 착륙하는데, 최첨단의 장치임에도 우주선이 받는 충격이 엄청난가 봅니다. 우주선 착륙 기사를 읽고, 하나님의 아들에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불편하셨고, 답답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낳자마자 걸어다니거나 책을 읽거나 못합니다. 목을 가누눈데 몇달이 걸리고, 뒤뚱거리고 걷기까지 일년이 넘는 세월이 걸리고, 말을 하고 의사소통을 하는데 3년가까운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어나기 전까지 우주선보다 더 좁은 공간인 엄마 뱃속에서 10달을 지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낳자마자 훌쩍 어른이 되버렸다던가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길고 복잡하고, 귀찮은 성장과정을 다 겪으시고, 삶의 희로애락을 다 겪으시고, 게다가 제자에게 배신당해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3일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돌덩이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셨는데... 말씀 한마디로 인류를 구원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인류를 순식간에 멸망시킬 수 있으신데 왜 이렇게 인류를 어렵게 구원하셨을까? 본문의 말씀처럼 왜 인간의 형체로 지극히 낮아지셔서 오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우주선 착륙캡술이 대기권의 열에 검게 그을리는 고통, 그리고 지상에 착륙할때 겪는 충격보다 훨씬 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3년전에 동경에서 전 지독한 피부병에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2주간 병가휴가를 주어 서울에 머물게 되었는데, 기적처럼 다 낳았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한적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프면 좋으련만..."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겉으론 퉁명하게 말했지만, 울컥 눈물이 나왔습니다.

나 아닌 존재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마음은 그가 겪는 고통을 대신 겪고 싶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죄많은 인간조차 그러한데 하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인간의 형태로 정말로 낮게 낮게 임하게 하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와 친구들,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에게 손을 내미셨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 사랑의 은혜에 빚진자입니다. 그 빚을 갚을 방법이 과연 있긴는 한가 싶습니다. 그래서 빚진 자로써 제 삶이 제 마음대로가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과 섬김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홍인철

2008-04-25 23:59:29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20:18-19)

지금 저에게는 겸손이란 말씀이 두가지로 와닿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에 대한 겸손이고 둘째는 나 자신에 대한 겸손입니다.

첫째 사람들에 대한 겸손입니다. 저는 저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나이가 어리거나 나보다 손아래라고 생각되는 분들에게는 동생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성격이 좋을 때도 있지만 종종 그들에게 나쁘게 보일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을 대할 때도 겸손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데 저의 짦은 경험이나 지식들을 가지고 가르치 듯 대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앞으로는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동생들을 대할 때도 바울과 같이 겸손과 눈물로 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겸손이란 것이 단순히 학교에서 배운 장유유서와 같은 예절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처럼 겸손과 눈물로 다른사람들 대하는 것이 겸손의 진정한 마음일 것입니다. 지금은 바울이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제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낮아지고 바울처럼 하나님께 눈물로 고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주신 훈련의 과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나 자신에 대한 겸손입니다. 달리말해 지금 제가 해야할 일들이나 상황, 학교에서의 학업등에 대해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겸손은 남들은 쉽게 알지 못하나 정작 나 자신은 잘 알고 있는 교만의 모습입니다.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 라는 말씀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과 시간과 열정등을 모두 쏟아서 열심히 생활하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신에 대한 겸손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인생을 허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겠지요. 흔히 [이정도 일쯤이야, 누워서 떡먹기, 2시간이면 끝나는 건데, 이런 걸 내가 왜하고 있어야 하나, 이런건 금방이라도 할 수 있어] 이러한 마음들이 들때는 나 자신에 대한 교만의 마음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내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성심을 다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겸손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마음을 바울의 가시처럼 생각하고 제 삶속에서 이 두가지 겸손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생활하겠습니다.

김정아

2008-04-26 01:44:30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상대편을 높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은 자신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 같지만, 다음 순간 높이 올라갔던 상대방이 중력 가속도를 붙여서 나를 더 높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반드시 그대로 된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겸손은 모두가 승자가 되게 하는 윈윈의 결과를 늘 예비하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법칙입니다. 세상에서는 겸손하면 내가 손해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그 겸손으로 인해 나도 높아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누구나가 이 법칙을 행하기 힘든 이유는 아마도 그 순간 자신의 낮아짐에 참을 수 없어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겸손이 아니라 왠지 작아지는 듯한 느낌... 내가 왜? 라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 수치심과 굴욕감은 말도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며,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을 때의 예수님 마음은
그 순간은 정말 참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들 앞에서 한 없이 낮아지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시고 높임을 받으시게 되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내 모습이 한 없이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아 겸손한 마음을 품으면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의 뒤를 높여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자... 그 모습을 닮아 매 순간 낮은자의 모습으로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 더 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끝없이 품을 수있는 덕스러운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박성옥 선교사

2008-04-26 03:23:4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마음을 소개한 부분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 성경에서 온유는 겸손과 동일한 의미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마21:5)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표현하자면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겸손하니’로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셨다.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빌2:5-8) 예수님의 겸손은 얌전하거나 말이 별로 없거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잘하는 등의 소극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참 겸손은 세상을 살리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남을 높이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인데, 그 목적이 남을 높이기 위해서이다.(잠16:19, 빌2:3)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


먼저 교회에 전도사로 있었을 때에 찬양인도를 전적으로 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귀중히 겸손히 잘 간직해야 되는데 그만 교만해서 괴로웠던적이 있었다.
딴사람이 찬양인도하는 꼴을 못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을 세우지 못하고 키워주지 못했던적이있었다.
얼마나 교만 했던지 .... 기도도안되고 찬양도 할수없게 되었다.
교만이 이렇게 무섭구나 하면서도 지금도 불쑥 불쑥 튀어저 나오는 교만.
내가 아직도 살아있기에 때로는 환경을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훈련 하신다.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고 했는데.....
남을 높이면 자연적으로 내가 높아 지는데...
발힌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은 완전히 죽지 않아서 그런것 처럼....
내 자아가 내 고집이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날마다 나를 죽이는 작업을 환경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께서 하늘보좌에 앉히신 것처럼....
내가 완전히 죽을 때 하나님께서 더나은 그릇으로 쓰임 받을 줄믿읍니다.

양미옥

2008-04-26 06:54:31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상대편을 높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은 자신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 같지만, 다음 순간 높이 올라갔던 상대방이 중력 가속도를 붙여서 나를 더 높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반드시 그대로 된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겸손은 모두가 승자가 되게 하는 윈윈의 결과를 늘 예비하고 있다.

주일날 속회를 하면서 속원들에게 예배드리면서 도전 받거나 은혜 받은것을 잠시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들 주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기억을 하면서 자신의 삶속에 적용하면서 살겠다고 다짐들을 하는것입니다.
특히 우리 속원들은 직장을 다니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또한 그분들은 모두 리더로서 세워진 분들입니다. 리더로서 갖추어야하는 태도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새기는 말씀이었던것같습니다. 겸손의 태도로 직원들을 돌보고 세우겠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말에 저 역시 겸손은 널뛰기와 같다라는 말씀으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저 스스로를 뒤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보다는 나의 교만한 마음이 앞서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것은 당연하고 ,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나의 교만함으로 막고 있는것은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속원들의 고백처럼 저역시 늘 낮아져서 겸손함으로 인생이 윈윈의 결과를 낳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유광옥

2008-04-26 15:30:43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두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세상을 향한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겸손이다.

가이드 일을 하다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해도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있다 보니
힘이 들때가 너무 많다. 하지만 내가 늘 마음에 새기는 일이
예수님 이라면 이럴때 참으시겠지, 예수님 이라면 이럴때
더 낮아져서 섬기고 겸손하시겠지 하면서 그때 그때 힘든 상황을
넘기려고 애쓰면서 일을 한다. 그래서 아무리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손님을 높여 드리고 한국 사람 중에도 저런 사람이 있구나!!
할 정도로 짜증나는 사람이 있어도 나는 늘 웃음으로 대처한다.
저번주에 일을 할 때도 4일 일본여행을 와서 3일내내 비가 오다
보니 손님들이 신경이 많이 날카로운 것 같고 어디를 가도
하코네를 가면 팔당댐과 똑같다는 둥 오다이바를 가면 한강이랑
똑같다는 둥 일본에는 별로 볼거리가 없다는 둥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그리고 나 또한 많이 짜증이 났지만 참고 일을 했더니
마지막날 점심을 먹고 나리타를 출발하려고 준비하는데
손님 한 분께서 나에게 "가이드님 크리스찬이시죠?"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하니까 "그냥 느낌으로 알았어요"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고맙고 기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열심을 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목적이 남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반성을 해본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높이기 위해서 높고 높은 세상에서 이땅에
오신 것처럼 나 또한 남을 높이기 위한 겸손을 배워서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를 소망한다.
늘 겸손해야지 하면서도 불쑥불쑥 그렇게 행동하고 마음먹지
못할때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세상을 향한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겸손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싶다.

박은주

2008-04-26 21:35:17

사람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은 종의 모습 즉, 섬김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 겸손의 모습은 하나님께 드린 겸손이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겸손의 참모습이었다.
겸손의 모습은 대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겸손은, 윗사람에게는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동료나 아랫 사람에게는 섬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의 이 겸손의 두 가지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요즘 한동안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는 일방적으로 남편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산달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나를 두고 퇴근시간이 늦은 것도, 나에게 서운하게 하는 모든 사건도 남편이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몇번의 대화-거의 일방적인 나의 불만을 말하는 것이었지만-를 통해서 나는 남편에게 ‘나도 부족하지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남편에게 가르치고 지적하고 불평하고…그렇때마다 남편은 ‘미안하다’라는 말뿐이다. 그런 남편이 더 답답하고 왜 반박하지 않냐고 그러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화 낼께 분명한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은 내가 ‘つよい’하다는 것을 은근히 흘린 적이 있었다. 내가 정말 그렇게 강한 사람인가?? 나는 나를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정말 강한 여자를 못 만나봐서 그렇다 하며 내 변명을 했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참 겸손하다. 우리 남편은 더욱이 더 그러하다. 내가 볼 적에는 바보스러울 정도로…어느 정도 자신을 어필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련만 남편은 그렇지 못하다. 난 가끔 그런 남편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남편을 내가 제일 무시한다. ‘당신 왜 바보같이 그러냐고….’
예수님 당시에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예수님, 왜요? 왜 그렇게 하세요? 라고 제일 반박하지 않았을까 싶다.
참 겸손은 마음속 저변에 뭔가 ‘꿍꿍이 속’ 다른 마음을 품고 낮아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진심으로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마음, 참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남들에게보다 가까운 가족에게, 너무나 쉽게 대하고 있는 나의 가족들에게 지금 바로 이 말씀을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남편을 무시하고 섬기지 못했던 내가 너무 하나님앞에서 부끄럽다. 끝까지 순종하고 겸손히 섬기기를 원한다.

김준근

2008-04-26 23:58:41

주님은 내 스스로가 낮아지시길 바라신다.
선행의 예로 누구나 알고 있는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되시면서도..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거나, 무릎꿇으시고, 죽기까지 하셨다.
물론 나는 낮아지는것이 너무 싫었을때가 있다.
지금도 겸손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주님을 알고,
나를 낮추는 시간이 많아졌다.
기도할때, 사람을 대할때, 가정에서, 회사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그 때마다 다른 상황이 나타났다.
일상생활에서는 인상과 사람들과의 관계, 회사에서는 상하관계의 유연성,
겸손이 없는 생활과는 확실히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요즘 바빠진 생활속에서 나는 정말 낮아지고, 겸손한가에대해
생각해보았다.
결과, 나는 주님과 동급 아니면 윗자리에 앉아 있는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의 답이 나왔다.
제자된자로써, 세상일에 빠져 허우적대고, 주님을 뒤로 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싶다.
마음만으로는 늘 바쁜일만 끝나면 다시 열심히 할께요하고, 핑계를 대고 있다.
내가 정말로 겸손해진다면, 그때는 스스로 시간을 내서. 십자가 앞에
엎드려 있는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지금하고 있는 일은 주님께서 주신일로, 최선을 다하겠지만,
주님의 일에도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고, 꼭 그러ㅗ 싶다.

남철

2008-04-27 07:41:2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고집되로 살면서 남을 생각하기보다 나자신을 먼저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던것 같습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신왕수

2008-04-27 10:51:12

"예수님은 높고 높은 하늘에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뛰어 내리셨다. 한없이 낮아지셨다. 하나님의 모습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 주인의 모습에서 종의 모습으로까지 낮아지셨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 받은 백성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올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힘껏 낮아지셨다. 그래서 우리는 일순간에 예수님 덕분에 영생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높아졌다."
→ 로마서 8장에도 이 부분이 나온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지신 우리 예수님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신 것이셨다. 또한 전에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게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생각하신 것이기에 그것이 가능했을리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이라도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셨다면,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겸손의 모습은 대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겸손은, 윗사람에게는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동료나 아랫 사람에게는 섬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의 이 겸손의 두 가지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천이 겸손을 잃어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 성품을 잃어 버리는 것이요, 결국 주님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 겸손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서로가 승리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성품과도 같은 겸손이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순종과 섬김이라는 모습으로~~^^

김진희

2008-04-27 12:09:28

교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은, 비록 그것이 몸의 치명적인 가시일지라도 기뻐하며 자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겸손의 보물을 끝까지 지켜 주기 때문이다.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어본다면 나의 못난 부분을 감사할 수 있게 해 주신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릴 때 부터 뭐 하나 잘하는 것 없고 제대로 하는 것 없어서 잘 기죽고 열등감이 많은 아이였다. 그 때는 부모님도 많이 원망하고 환경도 많이 원망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나의 그런 못난 모습들이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조금만 잘하는게 생겨도 교만해 질려고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많이 잘 나지 않은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남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럽고 잘 되지 않아서 그것도 불만이었지만 한 번 씩 내 속에 드는 생각들을 다 표현할 수 있는 내 놓는 다고 생각하면 말을 잘 못하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하나님은 내가 성숙하게 되기까지 못난 자의 모습을 가지고 낮아 지게 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도 조금만 다른 사람들 보다 잘한 다고 생각이 들거나 하면 자꾸 교만해 질려고 한다. 요즘 누구와 얘기를 해도 자꾸 마음이 안 맞다는 생각이 들고 말하기가 싫어진다. 대화 하기를 포기할려고만 했지 원인이 무엇인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말씀을 보니 내 마음에 교만함이 가득찼던 것이 깨달아졌다. 내가 맞는데 넌 왜 자꾸 그런말을 하니 하는 마음이었었던 것이다. 겸손함으로 예수님도 닮아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해야 겠다

하제란

2008-04-27 19:31:55

교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은, 비록 그것이 몸의 치명적인 가시일지라도 기뻐하며 자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겸손의 보물을 끝까지 지켜 주기 때문이다.

설교말씀 중..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라 하신 말씀에 더없는 나의 못났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다. 비록 세상사람들에게는 쓸데 없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심으로 인해 그 못난 것들이 더 없는 보물이라 생각되어진다. 나의 약점을 가시라 여기지 않고 그것들을 기쁨으로 여기고 나를 한층 더 성장시키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어야 성숙되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 직분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것이든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온 몸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것.. 특히 나를 이러한 모습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깊은 헤아림을 깨달아 나를 더욱 사랑함으로 남도 또한 사랑 할 수 있을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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