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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영광교회

여호와를 위하여

이용규목사, 2007-10-15 16: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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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위하여

말씀//창세기8:20

1.        주님의 심정
자신이 손수 만든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는가? 비록 인간의 타락과 부패로,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고 한탄하셨지만, 홍수를 통해서 모든 인류를 멸망시킬 때에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어쩌면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 주어 죽게 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인류를 멸하실 때에 하나님이 당해야 했던 고통은 그야말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도 아니고 모든 인류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어야 했으니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제일 잔인한 일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부모가 자식을 매질할 때 누가 더 아프겠는가?
당연히 부모가 더 아프다. 자식은 다리로 매를 맞지만, 때리는 부모는 가슴으로 매를 맞기 때문이다. 자식은 눈으로 울지만 부모는 가슴으로 울기 때문이다. 죄악으로 멸망 당하는 사람들보다 멸망시켜야 했던 하나님이 훨씬 더 괴로웠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위로가 되고 싶었다. 미약하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방주에서 내리자 마자 정성을 다해서 제물을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얼마나 마음이 아프세요. 말씀하지 않아도 저는 다 알아요. 그런 힘든 와중에도 이 못난 놈을 살려 주시려고 세심하게 신경까지 써 주신 것도 알아요. 하나님 감사해요. 하나님 제 마음이에요. 받아 주세요. 힘 네세요. 하나님 사랑해요. I love you god!’
이것이 바로 노아가 하나님께 드린 최초의 예배의 모습이다.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예배의 모습인가?
여기에는 자신의 탐욕이나 속셈 같은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위하여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예배를 드려 왔던가?  

2.        여호와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는 동기와 목적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의 동기와 목적이다. 예배의 목적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도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고 했다.(창8:20)
만약에 복을 받을 속셈으로 예배를 드린다거나, 칭찬받을 속셈으로 드린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서 드리는 예배인 셈이다. 이런 예배는 이미 예배가 아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타락한 도구에 불과하다. 뭘 받아내려고 드리는 예배는 타락한 예배요, 사기성 예배이다. 100점짜리 예배를 드리고 싶은가?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 자신의 만족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만족을 구하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 될까? 이 일에만 계속 집중하라. 예배에서 내가 무언가를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물론 예배는 보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뭘 본다는 말인가? 강대상을 본다는 말인가? 설교자를 본다는 말인가? 성가대를 본다는 말인가? 사람들을 본단 말인가? ‘예배를 본다’는 말은 교회 용어 중에서 제일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예배에 참석한 어떤 사람도 구경꾼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 모두가 예배의 선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모두가 뛰어야 한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거야!’
내가 만족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예배가 살아 역사하는 예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바로 ‘예배’이다. 노아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진정한 예배를 찾고 계신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느니라’(요4:23)      

3.     너를 위하여-여호와를 위하여
창6:14의 ‘너를 위하여’와 창8:20의 ‘여호와를 위하여’는 귀한 말씀의 쌍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노아와 하나님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노아를 ‘위해서’ 구원의 복을 주시고(창6:14) 노아는 하나님을 ‘위해서’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모든 만물은 들어 오는 것이 있고 나가는 것이 있을 때 건강하다.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고’ 이보다 더 건강한 관계는 없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노아처럼 이렇게 살면 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가서 보니까 음식은 똑 같은데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혈색이 좋고 건강한데,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굶어 죽어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원인을 알아 본 바에 의하면 숟가락에 해답이 있었다. 천국과 지옥의 숟가락은 모두가 길이가 3미터 정도되는 큰 숟가락인데, 뜨거워서 중간 부분은 절대로 잡을 수가 없고 맨 끝에만 잡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숟가락으로 자기 입에만 음식을 집어 넣으려고 하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원래부터 남을 섬기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그들은 그 큰 숟가락으로 멀리 있는 사람까지 음식을 먹여 주었다. 그러니 또 그들은 자기에게 음식을 먹여 주었다. 그래서 천국은 모두가 배불리 건강하게 잘 살고 있었던 것이다. 환경이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천국을 만든다. 서로가 서로를 먼저 챙겨주고, 걱정해 주고 신경 써 주고, 위로해 줄 때, 그 곳이 가정이든, 교회든, 회사든, 학교든 천국으로 화한다.
당신이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가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하여’이다. ‘그가 나를 위하여’는 그의 몫이고, ‘내가 그를 위하여’만 내 몫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내가 내 몫을 잘 할 때부터 풀리기 시작하는 법이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인의 말처럼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뭘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뭘 해 줄 것인가’를 늘 생각하는 사람이 건강한 관계의 리더가 되고, 주인공이 된다.
노아는 방주에서 내리자 마자, ‘하나님이 이제 자신을 위해 뭘 해 주실까’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노아의 위대함이요, 능력이요, 하나님이 감동하신 일이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이 당신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 것이다.
노아의 이 위대한 고민이 지금 당신의 최고의 고민이 되길 축복한다.

4.    노아의 예배
마지막으로 노아가 하나님께 드린 예배의 모습을 살펴 보자.
1) 자원 예배
노아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이것에 대해서는 지난 번에 상세히 나눈 적이 있다.
2) 제단 예배
노아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제물을 드릴 제단을 건축하였다고 했다.(창8:20) 뉴욕에 가면 일본 관광객들도 많이 방문한다는 유명한 교회가 있다. Times square church라는 교회이다.
우리가 주일 예배에 도착한 것은 찬양 부르기 30분 전이었는데도,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자의 안내로 자리를 배정받아 앉아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목회자들은 제단 위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성도들은 제단 밑에서 제단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었다. 정말 은혜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서 일찍 나와서 먼저 열심히 기도의 제단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기도 제단은 어떤가? 부실 공사인가? 아니면 아예 기초도 놓을 생각도 하지 않는가?
3) 정결 예배
노아는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 또 골라서 하나님께 드렸다. 그야말로 최고의 정성이 들어 있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과 혼과 영을 다 드려 예배할 때 최고로 기뻐하신다.(마22:37) 이것이 산 예배이다. 몸은 와 있는데 생각은 딴 데 가 있는 예배는 껍데기 예배에 불과하다. 정신 똑 바로 차리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4) 번제 예배
노아는 제물을 모두 다 태워서 하나님께 드렸다. 최초의 번제는 노아에 의해서 드려졌다. 번제 예배는 노아가 개발(?)한 예배 법이다.

이 4가지 예배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호와를 위하여’ 드린 예배이다.
노아의 예배가 당신의 예배로 전이되기를 축복한다.
예배를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예배가 살아야 인생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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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옥 선교사

2007-10-19 03:13:19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거야!
내가 만족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예배가 살아 역사하는 예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바로 ‘예배’이다. 노아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진정한 예배를 찾고 계신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느니라’(요4:23)

지난주 속회 시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나눔의 시간을 갖었다.
예배를 은혜 받기 위하여 일주일 동안 기도하며 사모하고 예배시간 30분전에 나와 기도로 준비하고 찬양을 하나님께 드려야 은혜를 받을수 있다고
나눔을 갖었다.
그러데 어떤 성도가 주일 예배에 30분전에 아들을 데리고 와서 기도하고 찬양 드리는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사람이 보기에도 이쁜데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얼마나 기쁨의 예배를 드렸는지 생각 하며 부끄러웠다.
안내를 하다보면 예배를 드렸는지 무엇을 했는지 모를 때가 가끔 있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서는 예배가 시작되면 문을 잠그고 들어 오지못하게 하는 이유를 알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드리기를 소원하며 .....
하나님의 기쁨이되는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이진애

2007-10-19 05:32:11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고’
이보다 더 건강한 관계는 없다.

사람 관계에서도 이 공식은 통한다.
나는 너를 위하는데, 너는 나를 안 위하고,
나는 너를 안 위하는데, 너는 나를 위하고... ㅎㅎ
말장난 같지만.. 이런 관계들이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나만 봐도 그렇다.
줬는데 반응이 없는 것도 싫고, 받았는데 그냥 시치미 떼고 지나치는 것도 싫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내게도 얼마나 많이 섭섭하셨을까?
기도했는데 안 이루어주신다고 투덜댈 줄만 알았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했던가?
그 분을 높이겠다고 손을 들고 찬양을 하고 열심을 내어 기도하는 흉내는 참 많이도 내 왔다.
이제 그러지 말자.
하나님이.. 내 사랑과 내 예배가 없어서 못 사시는 분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없이 못 사는 사람 아닌가?
아쉬운 쪽이 누구란 말인가?

이런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무 계산 없이, 정말 값없이.. 아니 오히려 ‘나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난 이렇게 살 수 없다.
지금 내가 신경써야 할 것은 ‘그가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하여’이다.
제발 남의 몫까지 신경 쓰지 말고 내 몫만 제대로 하자.
‘그가 나를 위하여’는 그의 몫이고, ‘내가 그를 위하여’만 내 몫이다.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살자.
다른 것 생각도 말고 보지도 말고...

황후연

2007-10-19 08:08:30

가인의 예배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5)

가인은 왜 분노하였을까? 하나님이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하나님이 제물 받으시는 것에 별 관심도 없고 그 제사가 습관적으로 당연히 드려야 할 그 무엇이었다면 그가 그토록 화를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비뚤어진 외골수의 사랑일지라도. 사랑이 거절당했을 때 그것은 증오로 바뀐다. 사랑의 깊이가 깊을수록 증오도 깊다.

창4:3에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린 후 4절에 아벨은 '자기도' 제물을 드린 것으로 성경에 나와있다. 제사에 시간적 격차가 있었다. 아벨보다 앞서서 하나님께 나아간 것은 가인이었고 아벨은 가인의 제사를 보고 뒤따라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다. 가인은 장자로서 그가 하나님 앞에 더 먼저 다가갔고 그래서 더 가까이 갔을거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심으로 가득찼을지도..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보기좋게 거절하고 오히려 상심해있는 가인에게 찾아가 네가 어찌하여 분노하느냐고 다그치신 후 선을 행하고 죄를 다스리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왜 그의 예배가 실패했는지 가르치셨지만 결과적으로 상처입은 짐승에게 더 깊은 상처를 입힌 셈이 되었다. 가인은 그 후 때를 노려 아벨을 죽인다. 가인의 마음을 채운 것은 분노와 그 뒤를 이은 광기였지만 그 본질은 질투였을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질투의 여호와라 하셨듯 질투, 즉 독점욕은 사랑의 본질이다.

가인의 예배를 보며 나의 예배를 돌아본다. 나는 실패한 예배로 인해 화를 내 본 적이 있는가? 감동없는 예배로 인해 억울해한 적이 있는가? 설교시간에 졸아놓고서 목내어 울어본 적이 있는가? 습관처럼 반복되는 예배를 의무적으로 드린 후 옆에서 감격으로 눈물짓는 형제를 보며 살해충동마저 느낄만큼 불같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는.. 가인만도 못한 예배를 드리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어 누구에게든 죽임을 면케 하신 것은 그의 그런 사랑, 비록 비뚤어지고 왜곡된 사랑임에도, 그리고 끝내 범죄로 이어진 사랑임에도 가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인의 예배가 노아의 예배와 오버랩되면서 떠오른 것은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거절하신 후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 4:7)라고 말씀하신다. 제물을 드림보다 중요한 것은 삶 가운데 선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고 싶었던 것이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죄, 즉 사단의 소원은 나를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꾸로 죄를 지배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한 삶을 이루는 것이 열납받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가인은 이 삶의 예배에서 끝내 실패하고 죄의 소원대로 그 지배하에 들어가버린다.

노아의 예배는 제단을 쌓은 그 한순간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선한 향기로움이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조화로이 어우러져 온전히 드려지는 것.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며 그 분의 마음에 가까웠던 것. 노아의 예배가 아름다움은 이 때문이다.

김수영

2007-10-19 18:34:57

귀한 제자훈련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요즈음 세상 일이 조금씩 풀려 나가기 때문에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준비 하신 큰 복이 있을 줄 믿으며 기대감으로 살아
갑니다. 요 몇달간 많은 일들을 치뤄 나가면서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 속에서 저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방향을 점검 할 수 있는 시간 이었던 것같습니다.
이번 말씀도 은혜를 받았지만 관심이 많이 갔던 곳은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서 예배 드리기 전에 목사님이 서서 기도하는 모습과
일반 성도들이 제단에 손을 언고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 찐한 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좋은 분들이 주위에 많이 계시는데 그중에 별명이 소우까 형님이라는 분인데 요즈음 보기 드물게 바른 생활을 하고 계신데
저를 격려 하실때 자주 쓰는 표현인데 정성이 가득하면 석산에 풀이 난다고 말씀과 타임 스퀘어의 성도들의 예배 전의 정성으로 준비하는
자세가 잘 어우리는 것같습니다.
하나님 일도 정성으로 세상일도 정성으로 하면 안풀리는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봤습니다.
모든 일에 대해서 아직까지 저의 정성이 부족 한가 봅니다.
특히 예배 드리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 시는 예배를 드려야 겠다고 마음으로 다짐을 합니다.

소대섭 전도사

2007-10-19 20:27:12

>>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위로가 되고 싶었다. 미약하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동행하려는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반성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의 모습을 통해서 겉으로는, 말로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떠벌리면서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결정하고, 나 혼자 행동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런 나 혼자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와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인생은 참된 동행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못 보는 이유는 너무 너무 거대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너무 가까이 하고 계시기에 볼 수 없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들을 때는 그말이 맞다고 생각하며 ...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구나.. 어디를 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는 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에 하나님 안 계시는 곳과 시간이 없구나... 하면서도, 정작 삶을 살 때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사는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개인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시간들을
보내거나... 혹은 뭔가 주어진 일에 몰두 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댓글을 빨리 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면 다른 일들이 먼저 생각이 나고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미 늦어버려, 댓글들 달 만한 여유를 모두 허비해 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이번주에도 마찬가지로 이러저러한 일로 인해서 댓글을 올리는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그러다 어제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아서 댓글을 달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메일을 확인하려고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대선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흥미있는 기사들을 클릭하고.... 뉴스 동영상까지 보았습니다. 사실 제게 그리 중요한 뉴스들은 아니지만, 그냥 궁금한 마음에 클릭을 하고 봅게 됩니다. 스스로는 '이런 것이 다 나중에 쓸모있는 지식이 되는 거야... '라고 위로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예전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결혼생활에 대한 글을 읽고 우리의 결심을 적어 보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글을 읽은 것은 한참 전이지만, 아직 그 레포트를 쓰지 못해 워드 프로그램을 또 켭니다. 일본에서는 한글 프로그램보다 워드 프로그램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글 프로그램은 오랫동안 사용을 해서 왠만큼 쓰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워드는 거의 써 본 적이
없어서 잘 다룰 줄 모릅니다. 특히 본문편집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어제는 본문 편집을 하면서 너무 짜증을 많이 냈습니다. 한 줄을 편집하면 전체문서가 다 편집이 되고... 그래서 Ctrl+Z를 눌러가며 편집을 하는 것이 너무 더디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집도 다 마치지 못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에 생각해 보니 그러느라고 감사노트도 적지 못했습니다. 새벽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연습을 위한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선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욕심과 교만한 마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연습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교만한 마음을 먼저 버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일이며 그 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부터 연습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저도 노아처럼 늘 하나님을 인식하고 동행하며, 나의 미약한 것이나마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 안에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어쩌면 인식하기를 거부했을지도 모릅니다...) 자라난 교만의 뿌리까지 뽑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 내가 만족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예배가 살아 역사하는 예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로서 예배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 오르는 것이 바로 설교시간입니다. 설교시간은 목회자에게 또한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저도 이러한 일반적인 상식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설교 준비하는 것을 생명과 같이 여깁니다. 물론 저는 아직 그러한 내공이 쌓이지 않아서 설교 준비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거의 모든 설교자들은 설교준비에 시간과 힘을 아끼지 않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번씩 새벽에 설교를 합니다. 짧은 시간일 수 있지만, 제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소중한 시간을 맡고서도 그렇게 긴 시간을 준비하지 못하고 단 위에 설 때가 있습니다. 매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자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준비하는데 그렇게 정성을 들이지 못해서 얼렁뚱땅 설교의 요지만 가지고 서서 그때 그때 생각나는대로 설교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는 돌아서서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미리 준비 좀 더 하고 올 걸...'하는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께 죄송하고, 성도들께 죄송하고.. 무엇보다 내 자신의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예배가 나의 만족을 위해서, 누군가 사람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깊이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예배를 준비하는데 얼렁뚱땅, 즉흥적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교만한 마음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모든 예배를 준비할 때, 혹은 기다리며 기도할 때 이렇게 하나님께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하나님!! 내 의견을 고집하게 마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기쁨, 위로, 권징을 선포하게 해 주세요~~'
무엇보다 교만한 마음부터 고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정관용

2007-10-19 23:32:07

오래 전 한국에서 “다리를 놓는 사람들“의 찬양과 경배학교에서 “예배”에 대해 강의를 듣고 서로나눔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설교를 읽고 다시 한번 기억을 되살려 예전에 정리한 노트를 찾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이 구절을 대했을 때 제 마음은 제가 무척이나 귀한 분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것처럼 기쁨과 기대감으로 두근거리기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 나라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씀을 통해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내내 참된 예배자를 찾으셨음을 확신 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의 활동에서도 예배는 거의 모든 것과 연결 됩니다. 중요한 모임 일수록 예배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일상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인예배, 가정예배, 속회예배 등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항상 예배가 있습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일수록 더욱 더 그렇지 않습니까?

예배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처럼 다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일시적인 유행처럼 끝나야 할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서적인 예배 이해와 성령의 기름 부음에 의한 예배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훌륭한 예배 프로그램이나 적절한 예배 환경 찾기 보다는 예배하는 인격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반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반응과 사귐의 연장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온 세상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알리시고, 그를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신다는 사실을 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안세진

2007-10-19 23:33:30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위로가 되고 싶었다. 미약하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이것이 바로 노아가 하나님께 드린 최초의 예배의 모습이다.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예배의 모습인가?”

제가 청년시절, 목자(속장)으로 섬기던 중•고•청 예배에서 저에게 강하게 말씀하셨던 주님의 음성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깨닫고는 예배는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의 표현을 마음껏 하는 자리”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 이후론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앞자리를 사모하며,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기쁨과 감격을 통해 언약궤를 옮길 때 다윗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이 생겨 뒷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아이들의 예배의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옆사람과의 대화는 물론이고, 책을 보는 아이, 심지어 엎드려 자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주님은 제 마음에 더 비수를 꽂으셨습니다. “내 사랑의 가치가 너희에게 이것밖에 안되니...?” 그 순간부터 흐르는 눈물은 다음날까지도 새벽예배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저에게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내가 어떤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지 더욱 깊이 깨닫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생각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가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하여’이다. ‘그가 나를 위하여’는 그의 몫이고, ‘내가 그를 위하여’만 내 몫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내가 내 몫을 잘 할 때부터 풀리기 시작하는 법이다.”

치바영광교회에 처음 왔을 때, 한 공간에서 모든 행사(예배, 찬양팀/성가대 연습, 식사, 제자훈련 등...)를 진행하려다 보니 분주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금은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려니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제가 다니던 한국교회에서의 예배의 모습과 자꾸 비교하며 불평 아닌 불평을 맘속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찬양팀 연습은 이랬으면 좋겠는데... 예배 전에는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지금 설교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과연 내 모습은 어떠했는가? 하고 말입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말씀은 항상 듣고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내 예배에는 적용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먼저 아름다운 예배와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에 힘쓰고 섬기지 못한 채 환경을 탓한 제 모습을 반성합니다. 요즘 기도할 때 ‘좁은 시선을 벗어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교회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할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치바영광교회가 이전하면서 제일 감사한 것은 전심으로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고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환경에서 참된 예배자들이 세워질 때 이곳에 더욱 큰 하나님의 영광이임할 것이라 확신하며 기대합니다. 그렇게 되길... 내가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한동수

2007-10-20 01:41:02

1. 주님의 심정
노아때와 같은 물로 심판하는 그렇게 큰 일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크고 작은 시련으로 단련시키시는것 같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동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너무 많은 일상들이 그것을 가리기때문이다.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가 그렇듯.. 항상 지나고 나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라고..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라는 말에서
나보다 먼저 하나님을 - 부모를 생각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2. 여호와를 위하여
자신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위(1.)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자연히 헤아려지게 되는거 같다.
나를 위하여 행동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방주를 통해 구원을 받고.. 그리고 죽을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더라...
이렇게 되는것이다. 그저 감동적인 동화의 해피 엔딩처럼..
하지만 우리 크리스챤에게는 그것이 해피 엔딩의 전부가 아니다
감사...
작은 일에 감사하고, 감사할 수 없는 일에 감사함으로 주님을 조금이라도 닮아가고 싶다.

3. 너를 위하여 - 여호와를 위하여
노아는 방주에서 내리자 마자, ‘하나님이 이제 자신을 위해 뭘 해 주실까’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노아의 위대함이요, 능력이요, 하나님이 감동하신 일이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항상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전한나

2007-10-20 08:03:30

노아의 예배가 당신의 예배로 전이되기를 축복한다.
예배를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예배가 살아야 인생이 산다.
사무짱은 교회에 오면 계속 잠만 잔다.
본당에 가서 예배를 드려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엄마인나는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사무짱을 본다는 핑계로 밖에서 예배에 집중하지않고 딴짓만 한다.
아들이 엄마 예배드리는데 이렇게 협조하는데 엄마인 나는 딴짓만하고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일이 진정한예배 인데 예배를 하찮게 여기니 아들볼 체면이 서지 않는다.
이번주 부터는 본당에서 집중해서 예배를 드려야 겠다.

김철중

2007-10-21 08:14:31

내가 만족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예배가 살아 역사하는 예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바로 ‘예배’이다.

선호를 보면서 무슨 짓을 해도 이쁜 때라는 생각이 든다. 별로 부모를 위해서 하는 일도 없음에도 그냥 이쁘다. 오히려 장난치고 부수고 어지럽히고 아빠 안경을 망가트려도 이쁘다. 특히 사고치고 아빠를 부를때가 제일 이쁘다.
이렇게 이쁜 선호지만 난 선호가 성장하길 바란다. 5년뒤에도 선호가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 큰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하나님도 같은 생각으로 우리를 키우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주님만 불러도 흐뭇하셔도 몇년이 흘러도 똑 같다면 크게 걱정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선호를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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